26일 낮 12시 서울 여의도 LG트윈타워. 동관 지하 1층에 있는 550석 규모 구내식당은 불이 꺼져 있었다. 반대편의 서관 식당(500석)은 문을 열었지만 평소 입구에 10여m 넘게 줄 설 정도로 꽉 차 있던 모습과 달리 곳곳에 빈자리가 보였다. 지하에 입점한 음식점, 카페 등 다른 가게들도 한산했다. 7000여 명이 들어가는 트윈타워가 평일에 이처럼 조용한 이유는 지난 20일 종무식을 한 다음 날부터 지주사인 ㈜LG를 비롯해 LG전자·LG화학·LG디스플레이 등 주요 계열사 직원 상당수가 연말 휴가를 떠났기 때문이다. LG그룹 관계자는 "여름휴가철처럼 건물 전체가 고요하다"며 "아예 내년 1월 1일까지 12일간 휴가를 가는 직원도 있다"고 말했다.

연말연시에 회사 전체가 통째로 휴가를 가는 '서구식 집중 휴가제'가 국내 기업들에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기업들이 "잘 쉬어야 일도 잘한다"는 판단에 직원들에게 길게는 열흘 이상 휴가를 갈 수 있게 하거나, 크리스마스를 시작으로 필수 인력만 남기고 장기 휴무에 들어가고 있다. 직원들도 "회사 차원에서 일괄적으로 휴무를 실시해 눈치 보지 않고 휴가를 보낼 수 있어 좋다"고 반기는 분위기다.

◇미국·유럽처럼 '연말은 쉰다'

미국·유럽에서는 크리스마스를 전후로 짧게는 1주일, 길게는 한 달 가까이 쉬는 문화가 정착돼 있다. 반면, 한국에선 그동안 종무식 등 회사 행사 때문에 12월 마지막 날까지 출근해왔다. 변화의 조짐은 4~5년 전부터 제조 대기업을 중심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연말이면 해외 고객사와 파트너사 등이 대부분 연말 휴무에 들어가는 만큼, 공장 가동 효율이 떨어졌다. 업무량이 줄어든 연말 근무는 오히려 효율을 떨어뜨릴 수 있다고 본 기업들은 연말 집중 휴가제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는 최근 IT(정보 기술)·건설·서비스·유통업계 등으로 확산됐다.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 워라밸(워크 앤드 라이프를 줄인 말로 일과 휴식의 균형을 맞춤) 문화의 확산과 맞물린 것이다. 기업들은 연초에 미리 휴가 일정을 공지해 직원들이 여유 있게 휴가 계획을 짜도록 배려하고 있다.

두산그룹은 크리스마스를 시작으로 내년 1월 1일까지 약 8일간 임직원에게 휴가를 가도록 했다. GS그룹 계열사 중 GS에너지와 건설·스포츠 등도 25일부터 최장 8일 동안 쉰다. 롯데지주·롯데칠성·롯데정밀화학은 공식적으로 30~31일을 휴무일로 정했다. 그룹사 임직원 절반 정도는 25일부터 남은 연차를 써서 휴가를 가도록 했다. 종무식을 따로 열지 않기로 한 삼성전자는 25일을 전후로 1월 1일까지 자유롭게 연차 휴가를 쓰도록 권장하고 있다. CJ제일제당은 올해 처음으로 연말 휴가제를 도입했다.

제약업계에서도 최근 2~3년 전부터 연말 휴가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한미약품·녹십자 등 제약 기업 10여 곳은 직원들에게 연말에 1주일 이상 휴가를 가도록 했다.

업계 관계자는 "휴가 등 복지가 좋은 외국계 기업으로 이직하는 경우도 있어 인력 유출 방지 차원에서도 연말 휴가를 늘리는 추세"라고 말했다.

◇일과 삶 균형 중시

벤처업계에선 보상 차원으로 연말 집중 휴가제를 운용하는 경우도 많다. 배달의민족을 운영하는 우아한형제들은 지난 20일 전 직원을 대상으로 연말 송년회를 연 뒤 다음 날부터 1월 1일까지 전 직원에게 휴가를 가도록 했다. 이 기간은 연차 휴가를 쓰는 게 아니라 유급휴가를 줬다. 김봉진 대표는 "구성원들의 헌신으로 회사가 살아남았고, 이에 대한 감사함으로 전체가 쉬도록 했다"고 밝혔다.

게임 서버 개발 스타트업 아이펀팩토리도 매년 12월 24일부터 1월 1일까지 복지 차원에서 '전사 연말 휴가'를 실시하고 있다.

반면 인력난에 시달리는 영세 중소기업들에 연말연시 휴가는 ‘그림의 떡’이다. 중소 제조업체 관계자는 “휴가로 한 명이 빠지면 대체할 사람이 여의치 않아 연차 휴가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며 “이런 상황에서 장기 휴가는 엄두도 못 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