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3000억원 출자하고 VC가 운용, 제조업체 기술에 투자

제조업체의 연구개발(R&D) 프로젝트에 투자하는 전용 펀드가 3000억원 규모로 조성된다. 산업통상자원부의 R&D 예산을 예치하는 민간 은행들이 출자해 펀드를 만들고 이를 벤처캐피탈이 운용보수(수수료)를 받고 제조업체의 R&D에 투자하는 방식이다. 정부가 R&D에 투자하는 민간 펀드를 조성하는 것은 처음이다.

지금까지 정부는 예산을 단독 출연하거나 국책은행 등과 함께 출연하는 방식으로 R&D를 지원해왔다. 지원할 기업도 정부 산하기관에서 정했다. 하지만 정부는 이런 방식을 바꿔 벤처캐피탈이 투자할 제조업체의 기술력을 분석해서 투자를 진행하고 R&D에 성공해 특허 등으로 수익이 생기면 이를 펀드에 돌려주는 방식으로 R&D 지원 방식을 바꿀 계획이다.

11월 20일 오후 경기도 안산시 율촌화학 기술연구소에서 열린 ‘제2차 소재·부품·장비 경쟁력위원회’에서 홍남기(가운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을 비롯한 참석자들이 시설 설명을 듣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이 같은 내용의 R&D 펀드를 조성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26일 밝혔다. 산업부는 이 펀드 조성·운용계획을 내년 1월 대통령 업무보고에 포함시킬 계획이다.

펀드는 산업부에 배정된 R&D 예산을 예치하는 대가로 민간 은행들이 출자하는 방식으로 조성된다. 산업부는 내년에 R&D 예산 4조1700억원을 집행할 계획이고 이를 몇개의 은행에 나눠 예치한다. 현재 예치 은행을 선정하고 있는데 이 은행들에게 일종의 ‘이자’ 성격으로 출자금을 요청해 펀드를 조성하는 것이다.

산업은행, 기업은행 등 국책은행 뿐 아니라 시중은행도 입찰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내년 1월 중순 예치 은행이 선정되면 이 은행들은 3000억원을 공동 출자해 R&D 펀드를 만든다. 성공 가능성이 높은 R&D에 대해서는 펀드와는 별도로 은행들이 추가 출자할 수도 있다.

펀드 운영은 벤처캐피탈 등 전문 운용사에 맡긴다. 산업부 관계자는 "정부의 예산으로 기업에 투자나 출연할 때는 정부 산하 위탁기관이 표준양식에 따라 외부평가위원의 평가를 통해 기업들을 선별하지만 대부분은 투자나 출연의 성과가 거의 없는 경우가 많았다"며 "예산만 투입하고 성과가 좋지 않다는 정부 내부의 고민이 많아 아예 벤처캐피탈 등 민간에서 기업의 R&D 투자를 선별해 투자하는 구조로 판을 새로 만들려는 것"이라고 했다.

정부는 매년 국내총생산(GDP)의 4.5%에 달하는 예산을 기업 R&D 지원에 쓰고 있다. 이는 이스라엘과 함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높은 비중이다. 그러나 GDP의 2~3%만 투자하고 있는 영국이나 프랑스보다도 제조업체의 기술력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정부 내부에서조차 ‘예산 낭비’라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왔고 어떻게 예산을 투자해야 제조업 기술력을 끌어올릴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있었는데 결국 민간 영역에서 기술력을 알아보고 효과적인 투자를 이끌 수 있는 전문성을 빌리자는데 의견이 모인 셈이다.

정부는 이번에 은행 이자형태로 조성된 펀드의 수익률을 모니터링한 후 성공적인 성과가 나오면 정부 예산을 직접 펀드로 조성하는 방식으로 펀드 규모를 확대할 계획이다.

장석인 한국산업기술대 교수는 "정부나 공공기관이 R&D 기술력에 대한 투자판단을 할 때 성공 가능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부분이 많은데 민간 부문인 벤처캐피탈이 이런 부분들을 좀 더 잘 살펴봐서 투자와 지원을 하라는 취지"라며 "정부와 민간 부문이 함께 기업의 기술력을 평가하면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