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경제 분리 가속으로 많은 나라들이 ‘양자택일’ 강요받을 것 韓, 다자주의 원칙 고수하면서 양자 무역협정 체결도 늘려야 유럽경제, 英 브렉시트로 과도기적 혼란 불가피

"첨단기술, 그 중에서도 특히 인공지능(AI) 관련 기술이 ‘업의 본질’을 바꿔놓으면서 점점더 많은 서비스업 종사자들이 영향을 받을 것이다."

경제 규모에서 각각 세계 1위와 2위를 차지하는 미국과 중국 간 갈등이 장기화되면서 2020년 새해 세계 경제에도 불확실성의 그늘이 커지고 있다. 미·중이 최근 1단계 무역합의에 도달했지만, 두 나라의 갈등이 그렇게 쉽게 봉합될 것으로 믿는 전문가는 찾아보기 어렵다. 미·중 무역전쟁의 본질은 '유일 초강대국 지위를 중국에 넘기지 않겠다'는 미국이 지켜온 '세계 리더' 자리를 노리는 중국의 이해관계 충돌로 초래된 '패권(覇權)전쟁'이기 때문이다.

볼프 소장은 미·중 갈등 외에 주목해야 할 불확실성 요인으로 AI 기술과 기후변화를 지목했다.

군트람 볼프(Guntram Wolff) 벨기에 브뤼겔연구소장은 조선비즈와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내년 11월에 있을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가 승리한다 해도 다자주의에 대한 미국의 회의적인 태도와 중국에 대한 적대감은 바뀌지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또 두 나라 경제의 탈동조화(디커플링) 가속으로 한국과 유럽연합(EU) 회원국들을 포함해 많은 나라들이 미국과 중국 중 한쪽 편에 설 것을 강요받는 상황이 올 것을 걱정하기도 했다.

볼프 소장은 독일 본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고 분데스방크에서 이코노미스트와 국제통화기금(IMF) 자문관을 역임했다. 브뤼겔연구소는 유럽을 대표하는 민간 싱크탱크다. 펜실베이니아대 산하 ‘싱크탱크와 시민사회 프로그램(TTCSP)’이 발표하는 전세계 싱크탱크 국제경제정책 부문 평가에서 지난해 미국의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PIIE)에 이어 2위에 올랐다.

그는 미·중 갈등 외에 주목해야 할 불확실성 요인으로 고용 환경에 큰 변화를 가져온 AI 기술과 세계 경제에 만만치 않은 비용 부담을 줄 수 있는 기후변화를 지목했다.

내년 세계 경제 흐름을 어떻게 전망하나.

“곳곳에서 지정학적 갈등이 불거지면서 시장에 불확실성이 커질 것이다. 예상하지 못했던 사건들을 많이 겪게 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내년과 그 이후 세계 경제 흐름을 좌우할 구조적인 문제들은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기술 발전과 기후변화, 소득 불균형 그리고 미·중 갈등이다.”

기술 발전과 기후변화는 어떤 점에서 변수가 될까.

“AI 기술을 비롯한 첨단기술은 업무 방식과 업의 본질을 획기적으로 바꿔 놓고 있다. 단순하고 반복적인 작업을 대신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서비스업으로도 점차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첨단기술은 국가 간 부(富)의 이동을 촉진하는 촉매 역할도 하는 만큼 경제에 큰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기후변화로 인한 비용 증가도 세계 경제에 점점 가시적인 부담으로 나타날 것이다. 국가 간 교역에서 배기가스 규제 등 환경 기준이 점점 엄격해 지고 있기 때문이다.”

첨단기술의 급속한 발전에도 선진국에서 노동 생산성(투입된 노동량과 그에 따른 생산량의 비율)이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로버트 고든 교수처럼 디지털 기술의 혁신성에 대한 기대가 ‘헛된 것’이라고 비관론을 펴는 이들도 있지만, 그보다는 측정 방식의 오류 때문으로 보는 게 맞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참여형 백과사전 위키피디아의 경우 무료 서비스이고 콘텐츠에 기여한 이들에게 아무런 보상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기존 방식으로 경제 효과를 산정하기 어렵다. AI 기술 발전으로 인한 생산성 혁신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지난해 구글의 AI 언어모델인 BERT가 대표적인 자연어처리 평가지표인 GLUE(General Language Understanding Evaluation)에서 인간보다 더 뛰어난 성적을 보여준 것이 대표적인 예다.”

로버트 고든 노스웨스턴대 교수는 로버트 고든 미국 노스웨스턴대학교 경제학 교수는 지금이 전례 없는 ‘혁신의 시대’라는 생각에 의문을 제기하는 대표적인 학자다. 1920~70년 평균 2.82%였던 미국 경제의 생산성 증가율이, 1970년부터 2014년까지는 고작 1.62%에 불과했다는 점을 들어 최근의 정보기술 발달이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전기나 자동차의 발명처럼 혁신적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해 왔다.

AI 기술이 빠른 속도로 인간 노동력을 대체하고 있다. AI 기술이 만들어낼 일자리 보다 그로 인해 사라질 일자리가 많을 것이라는 의견도 많다.

“AI와 자동화 기술은 맥도날드 점원의 주문 업무부터 변호사의 문서 처리 업무에 이르기까지 인간 노동의 다양한 분야를 빠른 속도로 잠식하고 있다. 이 같은 변화가 얼마나 빨리 진행될 것인지, 그리고 그로 인해 인간 노동자의 소득이 얼마나 영향을 받을지가 문제인데, 이에 대한 연구는 아직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

얼마전 미국과 중국이 1단계 무역합의에 도달한 것이 내년 세계 경제에 호재가 될까.

“그게 미·중 무역전쟁의 끝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미·중 갈등은 내년 미국 대선 결과와 상관 없이 이어질 것이다. 미국과 중국 경제의 분리가 가속화 되면서 한국과 EU 회원국을 포함해 점점 많은 나라들이 둘 중 한 편에 설 것을 강요받게 될 것이다. 이를테면 기술 표준에서 미국식과 중국식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 있다. 두 나라 경제의 탈동조화 가속은 세계 평화는 물론 글로벌 경제의 효율성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

한국은 어떻게 해야 할까.

“미국과 중국 사이에 끼어 있다는 점에서 한국과 EU는 비슷한 점이 있다. 최선을 다해 다자주의 교역 원칙을 고수하면서 우호적인 국가들과 양자 무역협정 체결도 늘려가야 한다. 그런 노력은 미국과 중국의 잘못된 무역 관행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역할도 할 것이다.”

내년 유럽 경제는 어떻게 전망하나.

“영국은 내년 1월 31일 EU를 탈퇴한 후 이후 연말까지 11개월 동안 브렉시트 전환(이행)기간을 보내면서 EU와 관계 설정을 마무리 해야 한다. 이 기간 동안 과도기적 혼란이 불가피해 보인다. EU 역내 최대 경제대국인 독일의 제조업 부진도 악재다.”

지난 11월 4일 홍콩 시위대가 홍콩 금융가인 센트럴 지역에서 시위를 벌이며 행진하고 있다.

중국 경제는 어떤가. 홍콩 사태도 영향을 줄까.

“성장세가 꺾이긴 했지만 중국 경제의 위상과 규모를 생각하면 지금의 성장률도 충분히 인상적이다. 앞으로 중요한 과제는 내수 경제 진작이다. 투자와 저축을 줄이고 소비를 늘려야 한다. 중국의 가계 저축률이 너무 높은 것도 경제 성장에 부담을 주고 있다. 홍콩 사태의 평화적 해결은 중국 경제의 미래에도 중요하다. 중국은 홍콩을 앞세워 해외 자본시장을 공략해 왔기 때문이다.”

전세계적인 부채 증가가 세계경제에 미칠 영향은 어떻게 보나.

“부채가 늘었다는 건 반대로 (돈을 빌려준) 누군가의 자산이 증가했다는 뜻도 된다. 금리 상승으로 이자 부담이 크게 늘어나지 않는 이상 큰 악재는 아니다. 전세계적으로 금리가 낮게 유지되고 있어 괜찮을 것이다. 걱정스러운 건 부채가 아닌 자산 가치 변화다. 불확실성이 커진 상황에서 금리가 조금만 변해도 자산 가치가 널을 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거액의 금융자산을 보유한 기업의 리스크가 커질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