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 수도 헬싱키에서 10㎞ 떨어진 에스포(Espoo)에 있는 VTT(핀란드 기술연구센터). 정부 산하 연구기관인 이곳 1층 로비는 연구소가 아닌 인테리어 가게처럼 보였다. 진열장에는 각종 플라스틱 포장재, 도배지 등 내장재, 조명 천 등이 놓여 있었다. 이들은 모두 핀란드 스타트업(초기 벤처기업)이 VTT의 기술을 활용해 개발한 친환경 제품들이다.

인구 550만 중소 도시 핀란드에선 스타트업이 매년 4000개 이상 탄생한다. 게임 '앵그리버드'와 '클래시 오브 클랜'을 만든 로비오와 수퍼셀, 온라인 음악 스트리밍 업체 '스포티파이' 등 세계적 기업들도 나왔다. 홀거 포흘러 VTT 연구원은 "단순 IT(정보 기술)를 활용한 서비스로는 이제 승부를 걸기 어려워 첨단 기술로 앞서나가야 하는 시점"이라며 "바이오·친환경 기술을 적용한 핀란드의 첨단 기업들이 앞으로 세계 창업계를 이끌 것"이라고 말했다.

◇'친환경 테크 스타트업'의 본산

임업(林業)으로 유명한 나라답게, 이곳엔 폐(廢)나무나 종이를 재활용한 친환경 스타트업이 즐비했다. '우들리'는 나무에서 채취한 셀룰로오스(식물 세포벽의 성분)로 플라스틱 제품을 만드는 업체다. 이 과정에서 배출하는 이산화탄소는 종전 플라스틱의 4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일반 플라스틱 제품은 석유에서 채취한 에틸렌 등으로 만든다. 일반 플라스틱과 다르게 땅에 묻으면 2년 안에 분해되는 것도 장점이다. 이 회사는 현재 식료품과 제조업체에 포장 용기를 납품하고 있다. 낚시찌 제품을 포장한 플라스틱을 만져보니 일반 플라스틱과 차이가 없이 투명하고 단단했다. 자코 카미넨 CEO(최고 경영자)는 "내년엔 화장품 용기나 카페용 컵을 친환경 플라스틱으로 만들어 본격적으로 시장을 넓힐 예정"이라고 말했다.

핀란드의 친환경 테크 스타트업들이 폐(廢)나무나 종이를 활용해 만든 제품들. 왼쪽부터 ‘팹틱’의 나무 섬유 쇼핑백, ‘우들리’의 셀룰로이드 플라스틱, ‘술라팩’의 톱밥 화장품 용기, ‘스핀노바’의 종이 펄프 섬유.

'팹틱'은 버려진 나뭇조각에서 섬유를 뽑아내 쇼핑백을 만든다. 일반 종이보다 부드럽게 접히면서도 찢어지지 않았다. 핀란드 최대 백화점 업체 '소코스'가 이달부터 이 친환경 쇼핑백을 도입했다. 튼튼한 데다 방수도 돼 여러 번 쓸 수 있고, 종이로 재활용까지 할 수 있어서다. '술라팩'이란 스타트업은 나무 톱밥으로 화장품 용기를 만들어 프랑스 샤넬에 공급하고 있고, '스핀노바'는 종이 펄프에서 실을 뽑아내 옷감을 만든다. 종전 제작 공정보다 물을 99% 적게 쓰고, 유해 화학물질을 전혀 배출하지 않는다. 핀란드를 대표하는 패션회사 '마리메코'가 이 회사의 옷감을 활용한 옷을 내놓을 예정이다.

친환경 식품 스타트업 '솔라푸드'는 인공 고기 원료로 쓰이는 친환경 단백질을 생산한다. 노란색 분말 형태 단백질 가루는 소나 돼지 같은 가축의 살이 아닌 박테리아를 이용해 만든다. 공기 중에서 이산화탄소를 채집하고, 물에서 전기분해한 수소를 박테리아 먹이로 공급하면 박테리아가 액체 상태 단백질을 만들어내고, 이를 분말 형태로 가공하면 완성된다.

날씨나 토지의 영향을 받지 않고 단백질을 생산할 수 있어 훨씬 친환경적이라고 한다. 똑같은 단백질 1㎏을 생산하는 데 소고기는 1500배, 콩은 250배 더 많은 물을 쓴다. 창업자 주하페카 피카넨은 "미국 '비욘드미트' 같은 인조육(肉) 업체에 단백질 원료를 납품하고 자체 음식도 개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학생 10명 중 4명 "창업 꿈꾼다"

VTT 출신 친환경 기술 스타트업은 총 22곳에 이른다. 이들이 확보한 투자금만 총 8200만유로(약 1065억원)다. 헬싱키에서 매년 열리는 세계 최대 스타트업 전시 행사 '슬러시(Slush)'는 이들이 세계적인 회사에 홍보와 투자 유치를 벌이는 장이다. 슬러시는 지난 2008년 대학생 자원봉사자들이 시작해 매년 열리는 행사로, 지난달 행사에선 전 세계 스타트업 3500곳과 투자자 2000여 명, 관객 2만5000여 명이 모였다.

핀란드 수출 경제의 20%를 차지했던 노키아의 휴대폰 사업이 몰락한 이후 핀란드 정부와 산업계, 학계는 무너진 경제를 되살리고자 첨단 기술 인력과 인프라를 활용한 창업을 독려하고 나섰다. 핀란드 정부는 지난해 스타트업 비자 제도를 도입해 유럽 국적이 아닌 사람도 자유롭게 핀란드에서 창업할 수 있게 허가를 내주고 있다. 전 국민이 영어를 사용하는 데 익숙해 글로벌 사업을 할 수 있고, 헬싱키를 중심으로 30분 거리에 연구소와 대학, 기업들이 모여 있어 산·학·연(産學硏) 협력이 이뤄지는 것도 창업에 유리하다.

얀 라이네 알토대 혁신 담당 부총장은 "핀란드 고등학생과 대학생 중 '창업자가 되고 싶다'는 사람의 비율이 40%에 이른다"며 "실패를 용인하는 사회적 안전망과 무너진 경제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위기의식이 청년들을 창업의 길로 이끌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