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7일 오후 수도권 인근에 있는 한 농기계 제조업체. 검은색 작업복 차림의 회사 대표 A사장이 직접 목장갑을 끼고 트랙터 연결 장치를 검수하고 있었다. A씨 회사는 연 40억원대 매출에 특허 2개와 품질관리 인증(ISO 9002)을 획득한 탄탄한 업체다. 하지만 일흔을 바라보는 A사장은 요즘 밤잠을 설치고 있다. 그는 "어느 날 내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이 공장은 통째로 고철이 되는데, 이어받을 사람은 없고…. 정말 답답하다"고 했다. 금융사에 다니는 큰딸이 있지만, 아버지 회사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3년 전 둘째 사위가 잠시 일했지만 2년 만에 손을 들었다. 한 달에 하루 이틀 쉬면서 매일 아침 8시부터 회사에 나와 공장 돌리고 대리점까지 관리하는 게 힘들다는 이유였다. A씨는 결국 회사 매각까지 생각했다. 그런데 이마저 선뜻 인수하려는 이가 없었다.

한국 중소기업이 고령화하면서 맥(脈)이 끊길 위기에 처해 있다. 세대교체가 절실한 상황이지만 제조업이나 기업 경영자에 대한 사회적 경시, 경영 환경 악화, 상속세 부담 등으로 자녀나 전문 경영인 등 후계자를 찾는 것부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수십 년간 묵묵히 한국 경제와 수출을 떠받쳐온 중기의 몰락은 한국 제조업 생태계 붕괴로 이어질 것이라는 경고가 나온다.

중기 절반 "물려줄 계획 없다"

경기도 안산 반월공단에서 30년간 기계 부품 제조업체를 운영해온 B(65)씨는 20여년 전 공작 기계를 만지다 손가락 하나를 잃었다. 그는 "이 바닥에서 손가락 10개 있는 사장은 드물 것"이라고 했다. 그는 "몸도 아픈데 직원 월급 주고 나면 남는 것도 없다. 그래도 기술자라는 자존심, 한국 경제 보루라는 신념 하나로 버텨왔는데 지금껏 쌓은 노하우는 우리 세대에서 끝나게 될 것"이라고 했다.

한국M&A(인수·합병)거래소에 따르면, 지난해 730개사가 매물로 나왔다. 이 중 16.2%인 118사가 후계자를 구하지 못한 경우였다. M&A거래소 관계자는 "기계·부품 등 제조업이 대부분인데 사장 평균 나이가 66.2세"라며 "회사를 맡으려는 이가 없어 매각하는 게 최근 새로운 유형으로 자리 잡고 있다"고 말했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지난 10~11월 중소기업 대표 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했더니 50.2%가 "기업을 물려줬거나, 물려줄 계획이 없다"고 답했다. 금형 업체를 운영하는 C(65)씨는 "요즘처럼 사회 전반에 반(反)기업 정서가 흐르는데, 누가 힘들게 중소기업을 맡겠느냐"고 했다. 국내 유명 치킨 프랜차이즈 업체 상당수도 회사 매각을 추진 중이다. 한 프랜차이즈 업계 관계자는 "갑질이나 일삼는 악덕 사업주로 인식하는 사회 분위기에 규제까지 심해져 회사 대표가 사업을 정리하려는 것"이라며 "100여곳이 매물로 나왔다는 소문이 많다"고 말했다.

중기 3곳 중 1곳, 대표 60세 이상

지난 2008년 중소기업 대표의 평균 나이는 49.6세(중소벤처기업부 조사)였다. 60대 이상 비율은 10.3%에 불과했다. 10년 뒤인 지난해 IBK기업은행 경제연구소 조사에선 중기 대표 평균 나이가 55세로 높아졌고 60대 이상 비율은 33%로 늘어났다. 우리 중소기업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지만 세대교체가 안 된다는 의미다.

중소기업 업력(業歷)이 길수록 매출과 고용이 많다. 이런 중소기업의 맥이 끊기면 그만큼 국내 산업과 고용에도 영향이 클 수 있다. IBK기업은행 경제연구소는 "앞으로 10년 내 중소기업 3곳 중 1곳에서 대표가 은퇴할 가능성이 크지만, (이 과정에서) 기업이 폐업 또는 매각될 가능성도 증가하고 있다"며 "30년 이상 중기의 자산·매출·고용은 10년 미만 기업의 4~5배 규모라 기업의 영속성이 단절되면 국가 경제 손실이 있을 수 있다"고 했다.

회사를 자녀에게 물려주거나 신사업을 하고 싶어도 상속세가 걸림돌이다. 양변기 부품 제조사 대표 D(67)씨는 최근 양변기 완제품 제조로 사업을 확대하려다 포기했다. 상속세 및 증여세법에 따르면, 회사를 그대로 유지한 채 물려주면 45년간 부품 제조사로 인정받아 상속세 공제 혜택을 받는다. 하지만 양변기 완제품을 만들면 신사업을 한 것으로 돼 이런 혜택을 받지 못한다. D씨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중기 사려는 중국 자본 많아"

회사를 맡을 사람이 없어 팔리는 중소기업이 늘어나는 것은 경쟁국만 좋은 일이 될 수 있다. 전북 익산의 한 기계부품 제조사는 올해 초 같은 업종의 중국 업체에 팔렸다. 회사 대표 E씨는 자녀에게 회사를 물려주는 것보다 차라리 회사를 팔아 현금과 부동산으로 물려주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업계 관계자는 "요즘 중국 기업은 기술력만 있으면 우리 중소기업 인수에 혈안"이라며 "한국이 쌓아 온 '메이드 인 코리아' 상표를 활용해 미국 시장을 뚫으려 한다"고 말했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교수는 "국내 기업 중 다수가 상속세 부담으로 결국 회사를 파는데, 이게 사모펀드를 거쳐 최종적으로 중국 기업 손에 들어간다"며 "미국에선 중국 기업에 회사를 매각하는 걸 까다롭게 규제하는데 우리는 무슨 대책을 세우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