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안 최고 등급 기관인 한국원자력연구원이 문재인 대통령의 '공정' 공약을 구현한다고 개인 신상 정보를 보지 않는 '블라인드 채용'을 하다가 중국 국적자를 선발하는 일이 벌어졌다. 과학계는 "능력 위주로 연구원을 뽑는 과학계의 수월성 원칙을 무시한 정치적 조치가 국가기관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고 비판했다.

한국원자력연구원은 11일 "지난달 종합면접심사 합격자를 발표한 뒤, 주민등록등본 등 기본증명서를 제출받는 과정에서 한 박사 합격자가 중국 국적자로 확인됐다"며 "지난달 14일 인사위원회를 열어 해당 연구원의 채용을 보류하고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해당 합격자는 중국에서 대학을 나와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기계공학 전공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지난 8월 말 인터넷으로 제출한 입사 지원서에는 중국 국적은 물론, 얼굴 사진과 이름·성별·학교 등의 신상 정보를 적지 않았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2017년 9월부터 정부 산하 출연연구기관들에 블라인드 채용 방침을 하달했기 때문이다. 연구원이 논문·특허 등 연구 실적을 제출할 때도 출신 학교를 가리도록 했다.

주한규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는 "중국은 우리와 원전 산업에서 경쟁하는 국가"라며 "안보 문제가 아니라도 산업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대전 지역 한 정부 연구기관 관계자는 "우리 연구원에는 중국이나 러시아로 유출되면 안 되는 국가 기밀 정보가 많지만 블라인드 채용에서는 이 국가들 출신 연구원 채용을 막을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과학계에서는 블라인드 채용이 연구 경쟁력을 떨어뜨린다고 비판하고 있다. 한 정부 연구소에서는 연구 경력을 허위 기재한 박사급 연구원의 채용을 취소하기도 했다. 지원자의 출신 학교와 지도교수에 대한 정보가 없어 미리 걸러낼 방법이 없었다. 그럼에도 정부는 여전히 블라인드 채용을 밀어붙이고 있다. 국가과학기술연구회는 11일 17개 정부 출연연구기관의 원서 접수와 필기시험을 공동 진행하겠다면서 선발 전 과정에는 블라인드 채용 방식이 적용된다고 명시했다. 정부 연구기관에 이어 지난해 말부터는 KAIST 등 4개 과학기술특성화대학도 교직원을 '블라인드 채용' 하도록 했다. 한 특성화대 총장은 "심지어 해외 석학을 초빙 석좌교수로 모셔오는데 블라인드 채용 때문에 지원 서류에서 이름과 학교 정보를 지우는 우스운 일이 벌어졌다"며 "외국에서 이런 일을 보면 뭐라고 하겠느냐"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