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항해 시대에 스페인이 만든 신대륙 지도에는 한때 캘리포니아가 섬으로 나오기도 했다. 스페인 탐험대가 1635년 워싱턴주(州) 북서부에서 내륙으로 깊게 파고 들어간 퓨젓사운드 만(灣)을 발견한 이후의 일이다.

스페인 탐험대는 이전에 발견했던 바하칼리포르니아(캘리포니아 남쪽에 길게 뻗어있는 반도)와 내륙 사이의 바다와 퓨젓사운드 만이 서로 연결돼 있는 것으로 추정했다. 이에 따라 1630년대 중반부터 1700년대 초반까지 스페인 등에서 만든 북미 대륙 지도에는 태평양 연안에 길쭉하고 거대한 섬이 자리잡고 있다.

원주민을 찾아나선 스페인 선교사들도 그 지도를 갖고 있었다. 이들은 몬테레이 지역에 상륙한뒤 배를 분해해 노새 등에 실었다. 섬 동쪽의 바다를 건너 내륙으로 가는 데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도가도 바다가 나오지 않았다. 높고 험준한 시에라네바다 산맥을 넘어 네바다 사막 한복판까지 간 뒤에야 그곳이 섬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중에 선교사들은 스페인 지도 제작자에게 지도가 틀렸다고 항의하는 편지를 썼다. 지도 제작자는 "절대 그렇지 않다. 당신들이 엉뚱한 곳에 있었다"는 답장을 보냈다. 이후 스페인 지도가 수정된 뒤에도 영국에선 1700년대 초반까지 잘못된 지도가 만들어졌다. 그 제작자는 "캘리포니아 섬을 한 바퀴 돌았다는 스페인 선원들의 말을 들었다"고 주장했다.

범선으로 미지의 세계를 탐사하며 어렵게 수집한 단편적인 정보에 상상력으로 덧칠을 했던 시절의 일이다. 누구나 범할 수 있는 잘못이고 해프닝이었다. 그로 인한 피해도 별로 없었다. 선교사들이 헛고생을 하며 골탕을 먹은 정도였을 것이다. 반면 정부가 엉터리 지도에 의지해 국정을 이끌면 심각한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 문재인 정부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친(親)노동 성향의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최근 발표한 ‘비정규직 규모와 실태’ 보고서에 따르면 월 임금총액 기준으로 하위 10%와 상위 10%의 격차가 5.39배로 작년(5.04배)보다 커졌다. 중위임금 3분의 2 미만인 저임금 노동자가 전체 노동자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작년 17.9%에서 올해 21.6%로 크게 늘어났다.

통계청 조사 결과도 비슷하다. 올해 비정규직과 정규직 임금 격차는 143만6000원으로 2004년 관련 통계 집계 이후 가장 크게 벌어졌다. 8월 기준으로 정규직 숫자는 1년 전보다 35만3000명 줄었고, 비정규직은 86만7000명 늘어났다. 3분기에 하위 20% 가구가 일해서 번 근로소득은 전분기보다 2만6000원 줄어들며 7분기 연속 감소세를 나타냈다.

세계적인 경기 둔화의 영향도 있지만 무엇보다 소득주도성장이라는 엉터리 지도의 잘못된 안내를 맹신한 탓이 크다. 저임금 근로자를 보호하고, 소득 불균형을 완화하기 위해 최저 임금을 대폭 올렸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저임금 근로자가 집중적인 타격을 입고 소득 불균형도 커졌다. 마차(소득)가 말(성장)을 끌고 갈 수 있다는 착각이 부른 정책 참사다.

부동산 시장에서도 정부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났다. 부동산 보유세 강화, 재건축초과이익환수제 부활, 민간주택 분양가 상한제 도입 등 강력한 대책들이 가격 상승을 더 부채질했다. 노태우 정부 이후 아파트값이 가장 많이 뛰어올랐다. 서울은 아파트 중위 가격이 9억원에 육박할 정도로 폭등했다.

집값을 잡고, 서민 주거를 안정시킨다는 명분으로 서울 집값 그중에서도 강남 아파트 가격을 억누르려다 사달이 났다. 정부가 규제를 강화할수록 ‘똑똑한 한 채’로 수요가 몰리며 서울 강남 집값이 다락같이 올랐다. 지역간, 세대간, 계층간 격차가 급속히 확대됐고 대다수 서민이 심각한 상실감과 박탈감을 느끼고 있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고 있다. "최저임금 인상의 긍정적 효과가 90%"라거나 "우리 경제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 "경제 기초체력이 튼튼하다"고 했다. 최근에는 "부동산 가격이 안정되고 있다", "소득주도성장의 정책 효과가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주장했다.

청와대에는 캘리포니아 섬을 한바퀴 돌았다는 스페인 선원들만 모여 있는 모양이다. 대부분 전문가와 국민 눈에는 보이지 않는데 청와대는 섬이 있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대항해 시대의 신대륙 탐사라면 그래도 별 문제 없다. 하지만 국정 운영에서 엉터리 내비게이션을 믿고 질주하다가는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

문재인 정부는 누가 봐도 최상위 0.1%나 1% 계층을 위한 정부는 아니다. 양극화와 소득 불균형에 대해 역대 어느 정부보다 강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장과 고용, 소득 불평등 문제에 대한 잘못된 처방으로 대다수 서민과 중산층에게 고통과 절망을 안겨주고 말았다.

대신 공공부문과 대기업 종사자, 전문직 및 고소득 자영업자, 서울 강남 아파트 소유자들이 수혜를 입었다. 결과적으로 문재인 정부는 상위 10%를 위한 정부가 됐다. 양극화가 심화되고 소득 불균형이 사상 최악 수준으로 확대됐다. 의도가 아무리 좋아도 이렇게 결과가 나쁘면 무슨 소용인가. 선의(善意)를 가지고 정책을 폈다고 변명하기에는 중간 성적이 너무 참담하다.

정책 기조를 근본적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 소득주도성장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버려야 한다. 시장경제 원리를 무시한 낡은 이념도 떨쳐내야 한다. 그래야 ‘남미형 경제’의 파국을 피할 수 있다. 이제라도 ‘캘리포니아 섬’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현실에 부합하는 새 지도를 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