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색 테슬라 모델S가 미국 한 도로에서 출발하자 '우르릉' 하는 엔진 소리가 울려 퍼졌다. 속도를 높이니 12기통 엔진에서 나올 법한 '두두두두' 소리가 지축을 흔들었다. 유튜브 영상에 담긴 테슬라 전기차 주행 장면이다. 전기차인 모델S는 원래 엔진이 없다. 당연히 엔진음도 나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일까. 미국 한 사운드 튜닝 업체가 만든 부품 때문이다. 이 부품을 차에 달고 차량 컴퓨터·스피커 등과 연결하면, 람보르기니 등 수퍼카 엔진음과 비슷한 '가짜 엔진음'이 속도에 맞춰 외부로 흘러나간다.

전기차의 장점은 소음을 내지 않는 정숙성에 있다. 하지만 워낙 조용하다 보니 보행자나 특히 시각장애인은 차량이 다가오는 것을 알아차리기 어려워 사고를 당할 위험이 있었다. 이 때문에 최근엔 주행 때 소리를 내도록 규제가 시행되는 추세다. 완성차 업체들은 '윙윙' 하는 전기모터음 대신 운전의 재미를 높이는 다양한 소리를 내고, 이를 브랜드 정체성으로 만들고자 다양한 연구를 하고 있다. 수퍼카처럼 쿵쿵 울리는 역동적 진동음이나 우주선을 탄 것처럼 '위이잉' 하는 높은 음역의 소리가 대표적이다. 전기차 확산으로 '엔진'이 사라지고 있지만, '엔진음'은 변신과 진화를 거듭하며 새로운 영역을 창조하고 있다.

영화음악 거장과 손잡은 BMW

미국 LA 서쪽 해안 샌타모니카엔 영화음악계 '거장' 한스 치머(62)의 개인 스튜디오 녹음실이 있다. 라이온킹, 캐리비안의 해적, 인터스텔라 등 영화음악이 이곳에서 작곡됐다. 아카데미상 음악상, 그래미 어워즈 등을 받은 치머의 별명은 '걸어다니는 오케스트라'다.

BMW 전기차 콘셉트카 '비전 M 넥스트'의 엔진음을 만들고 있는 작곡가 한스 치머(작은 원 사진)와 그의 개인 작업실. 각종 악기를 전자 장치에 연결해 소리를 조합하면서 엔진음을 만든다. 전기차엔 엔진이 없지만, 운전자를 설레게 하는 엔진음은 필수 요소로 꼽힌다.

최근 그는 BMW 전기차 엔진음을 '작곡'하고 있다. 오케스트라를 섭외해 몇몇 음절을 녹음하고, 컴퓨터로 조합해 전기차 엔진음을 만든다. 시동을 걸면 마치 대형 파이프오르간이 연주를 시작하는 것처럼 한 음에서 여러 음으로 확장되는 소리가 난다. 시동을 끄면 여러 음이 한 음으로 합쳐지는 소리가 들린다. 주행 중엔 속도 변화에 따라 음량과 음역이 4단계에 걸쳐 증폭된다. BMW는 이를 '추진→진화→고조→폭발'의 흐름이라고 설명했다. 폭발 영역의 소리는 F1 머신의 주행음과 가깝다. 치머는 "어릴 적 집에 있을 땐 차 소리만 듣고도 부모님이 오셨다는 걸 알 수 있었다"며 "BMW만의 엔진음을 만든다면, 다음 세대 아이들도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BMW는 이렇게 만든 엔진음을 차세대 전기차에 적용할 계획이다. BMW의 렌조 비탈레 전기차 사운드 엔지니어는 "앞으로는 누구든 이 소리를 들으면 BMW 전기차임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라며 "전기차 소리가 BMW 브랜드의 정체성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차는 밝고 편안하게

자동차 업체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전기차 엔진음을 만들고 있다. 현대차는 남양연구소 시뮬레이터 룸에서 실제 주행 환경과 흡사한 가상 환경을 만들고 전기차 엔진음을 개발하고 있다.

미리 작곡한 여러 엔진음을 틀어서 가장 듣기 좋은 소리를 고르는 방식이다. 현대차 관계자는 "가수들이 녹음 편집실에서 노래를 만들 듯, 음향 장비를 활용해 각 차의 콘셉트에 맞는 엔진음을 개발한다"며 "현대차는 밝고 편안함, 기아차는 활기차고 당당함, 제네시스는 조화롭고 웅장함을 추구한다"고 말했다. 현대차는 현재 외부로 나가는 엔진음은 보행자가 불쾌한 소음으로 여길 수 있어 최대한 줄이고 있지만, 앞으로 고성능 전기차를 개발하면 이에 걸맞은 강력한 엔진음을 탑재하려고 검토하고 있다.

메르세데스-벤츠의 고성능 브랜드 AMG는 미국 록밴드 린킨파크와 함께 엔진음을 만들고 있다. 전기모터음을 증폭한 소리를 엔진음으로 쓰는 포르셰는 전기차 구매 시 500달러를 추가하면, 내연기관 엔진음과 비슷한 소리를 내는 옵션을 고를 수 있다. 닛산은 엔진음에 화음을 입히는 기술을 적용하는 것을 실험하고 있다. 테슬라 창업자 일론 머스크는 차량 주행음이나 경적 소리 같은 효과음을 사용자가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는 선택지를 넣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일반적 경적 소리 대신 염소 울음소리 등도 쓸 수 있을 전망이다.

안내견 잘 들리게 높은 음역 소리도

업체들이 각기 다른 엔진음으로 개성을 표현하기 시작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유럽연합(EU)은 지난 9월부터 새로 출시되는 전기차와 하이브리드차가 시속 20㎞ 이하 저속 주행 시 56㏈ 이상 소리를 지속적으로 내도록 의무화했다. 이는 전동 칫솔이나 문서 파쇄기에서 나는 소음과 비슷한 수준이다. 주행 상황에 따라 소리가 변해야 하고, 후진할 때도 소리가 나야 한다. 비교적 높은 주파수의 음도 내야 하는데, 이는 시각장애인을 인도하는 안내견들이 더 잘 듣게 하기 위한 것이다. 한국·미국도 내년부터 비슷한 규정을 적용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