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탈(脫)원전·탈석탄과 재생에너지 확대 정책으로 사상 최악의 경영난을 겪고 있는 한국전력이 28일 이사회를 열었지만, 전기요금 체계 개편 등 민감한 사안은 안건으로조차 상정되지 않았다. 대신 정부 코드에 맞는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위한 고객센터 자회사 설립 및 출자(안)' 등만 논의했다.

한전은 이날 서울 서초동 한전아트센터에서 김종갑 사장 등 상임·비상임 이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이사회를 개최했다. 한전 이사진은 이날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위한 고객센터 자회사 설립 및 출자(안)'을 포함해 '취업규칙 개정(안)' '연봉 및 복리후생관리규정 개정(안)' 등 안건 7건을 논의했다.

한전 이사회는 지난 6월 여름철 주택용 전기요금 누진제 완화 개편안을 가결하면서 배임 논란이 일자, "필수 사용량 보장 공제 제도 폐지 등 전기요금 개편안을 11월 30일까지 마련하겠다"고 공시했지만, 개편안이 아직 마련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날 안건으로 상정조차 하지 않았다.

한전은 국내뿐 아니라 미국 뉴욕 증시에 상장된 기업이다. 미국 연방정부 기관인 증권거래위원회(SEC)는 지난 9월 한전에 '2018년 적자를 낸 원인과 한국 정부의 전기요금 인상 전망을 보고하라'는 공문을 보내기도 했다. SEC는 공문에서 "'한국 정부가 전기요금을 심하게 규제하기 때문에 연료비 상승 부담을 소비자에게 전가할 수 없다'는 한전 공시에 주목한다"며 "정부가 전기요금 인상을 하지 않을 경우 한전의 향후 이익에 미치는 영향을 밝히라"고 했다.

자유한국당 곽대훈 의원은 "정부가 미세 먼지를 구실로 내년 총선 이후 전기요금을 인상해 주겠다는 당근책을 제시하면서 그때까지는 전기요금 개편안을 거론하지 말라고 압박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날 이사회에는 한전의 재정난을 가중시키는 특례할인제도 운영에 관한 안건도 상정되지 않았다. 앞서 김종갑 한전 사장은 1조1000억원대의 각종 전기요금 특례할인을 모두 폐지하고, 전기요금 원가 공개를 추진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특례할인을 일괄 폐지하는 논의는 적절치 않다"며 일축했다. 올해 12월 만료되는 특례할인은 188억원에 달하는 전기차 충전 할인과 전통시장 할인(26억원), 주택용 절전 할인(288억원) 등 3가지다. 한전 고위 관계자는 "특례할인제도는 정부가 별다른 말이 없으면 일몰 시점이 되면 종료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사회 안건으로 따로 논의할 사안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한전 적자 때문에 바람직한 전기요금 정책조차 대책 없이 폐지된다는 비판이 나온다. 전기차 보급 확대를 위해 도입한 전기차 충전 요금 할인 혜택이 올 연말로 종료되면 당장 내년 1월 1일부터 전기차 충전 요금이 지금의 2배 이상이 돼 전기차의 최대 장점 중 하나인 낮은 운영비 혜택이 줄어들게 된다. 경영난에 빠진 한전 입장에서는 일몰 시기가 되면 자동으로 폐지되는 특례할인을 연장할 이유가 없고, 주무 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도 대안이나 계획을 내놓지 않고 있다. 특례할인을 연장하려면 한전 이사회 의결을 거쳐 약관 개정에 관한 정부 전기위원회 인가를 받아야 한다.

다만, 특례할인제도는 추후 임시 이사회를 열어 연장할 수 있다. 만약 올해 그대로 일몰되고 내년에라도 연장하려면 소급 적용하는 방법도 있다. 지난해 여름철 주택용 누진제 할인도 소급 적용한 바 있다. 장병천 한전소액주주행동대표는 "이사회가 공시까지 한 시급한 전기요금 개편이나 특례할인 폐지 등은 논의하지 않고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같은 정부 눈치 보는 정책만 추진하고 있다"며 "'거수기'로 전락한 이사회가 회사의 이익을 갉아먹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