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술 마시는 것을 즐기지 않고, 많은 사람들 앞에 서서 얘기하는 것도 불편합니다. 그냥 제 일만 열심히 하고 싶은데, 책임지는 자리를 맡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에게는 카리스마는 부족해 보이는데, 리더로서 결격 사유 아닌가요?"

리더십 과정에 강연하러 가면 중간 관리자급으로부터 가끔 듣게 되는 하소연이다. 외향적 성향이 아닌 내성적 성격의 사람일수록 그런 생각을 하는 것 같다. 그런 리더들에게 우선 판탱-라투르의 1870년 작 ‘바티뇰의 화실’(Un atelier aux Batignolles)을 보여주고 싶다.

이 그림에서 이젤 옆의 중앙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는 사나이는 에두아르 마네, 그림의 구도로 볼 때 그가 그곳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 가장 주목 받는 인물임을 알 수 있다.

1870년 판탱-라투르 작 ‘바티뇰의 화실’. 이젤 앞의 붓을 들고 있는 인물이 마네. 이 모임의 리더였음을 말하고 있다.

동일한 인물들을 모델로 바지유가 자신의 화실 장면을 그렸을 때도 마네는 여전히 이젤 앞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마네는 이 그룹의 공식 지도자였다는 뜻이다.

1864년 마네는 바티뇰 거리 34번지의 아파트로 이사해오면서 그곳과 가까운 마네의 화실 혹은 그 부근에 있던 허름한 카페 게르부아(Guerbois)에 젊은 화가들이 매주 정기적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마네가 1869년에 그린 ‘카페에서’(Au café)라는 판화에서도 카페 게르부아와 그곳에 정기적으로 모이던 화가들의 모임을 묘사하고 있다.

1869년 마네의 작품 ‘카페에서’. 카페 게르부아의 모습을 그린 판화다.

참석자로는 판탱-라루트, 르누아르, 드가, 모네, 유럽에서 활동한 미국화가 휘슬러, 바지유, 그리고 세잔 등으로 그 이름 하나하나가 근대 유럽 회화 역사를 장식한 저명 화가들이었다. 당시에는 아직까지 세상의 인정을 받지 못한 진보적인 젊은 그룹이었다.

세잔 고향 친구인 작가 에밀 졸라는 1866년 2월 바티뇰 지역으로 이사오면서 카페 게르부아의 고정 멤버가 되었다. 역시 작가이자 평론가인 이폴리트 바부, 루이 에드몽 뒤랑티, 필립 뷔르티와 같은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1863년부터 1875년까지 주로 이곳에서 만났기에 동네이름을 따서 ‘바티뇰 그룹’ 혹은 ‘마네파’로 불렸다. 젊은 시절 모네가 따라다니며 야외에서 풍경화 그림을 배웠던 화가 외젠 부댕은 이렇게 강조한 적이 있다.

"어느 누구도 비평을 받거나 비교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고립된 세계 속에서 홀로 예술을 창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홀로 고고하게 지내서는 제대로 된 창조가 어렵다는 말이고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다. 생각이나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과의 커뮤니티, 즉 ‘따로 똑같이’ 정신이다. 카페 게르부아와 마네의 작업실은 그 모임의 구심점이 되었다.

카페 게르부아를 중심으로 모이던 예술가들은 프랑스 화가들의 등용문인 국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새로운 경향의 미술을 추구하는 방법에 관해 치열한 논의를 했다. 술은 많이 마시지 않고 대화를 많이 했다고 한다.

이미 명성이나 실력 등의 이유로 젊은 예술가들이 마네를 중심으로 모였다. 마네는 실제로 바티뇰 그룹의 리더였지만, 카리스마 있는 스타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훗날 폴 아르망 셀베스트르는 이렇게 회상했다.

"마네는 특정 유파의 우두머리는 아니었다. 마네에게는 보스 기질이 없었으며 잘난 척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그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개인주의와 개성이 강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예술가들의 리더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면면이 서로 어울리기 힘들 것 같은 화가들과 작가들을 정기적으로 모이게 만든 마네의 리더십은 연구대상임에 틀림없다. 바로 여기서 새로운 근대 예술과 인상주의라는 예술혁명이 탄생되었기 때문이다.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라는 책에서 짐 콜린스가 최고능력 단계의 리더십에 올라선 사람의 공통점으로 지적한 ‘조용하고 겸손한 리더십’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다. 경영학의 구루라고 하는 피터 드러커도 일찍이 이렇게 강조하지 않았던가?

"리더십은 분명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소위 말하는 리더적인 기질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카리스마와는 더욱더 관계가 없다."

1863년 국선 낙선전에 발표하여 논란의 중심에 섰던 마네의 ‘풀밭 위의 오찬’.

클로드 모네가 마네를 알게 된 것도 바로 카페 게르부아에서였다. 마네와 모네는 이름이 비슷하여 종종 혼동하기 되지만, 가정환경이나 성격, 그림 스타일 모두 상이했다.

마네가 모네보다 여덟 살 많았다. 모네가 마네를 찾아올 무렵 마네는 모네와는 비교도 안 되는 유명화가였다. 1863년 낙선전에서 발표한 ‘풀밭 위의 오찬’과 그 뒤의 ‘올랭피아’ 등의 작품으로 마네는 기존 화단에 도전하는 그룹의 기수처럼 여겨졌다.

그런데 평론가 자샤리 아스트뤼크가 1866년 국전 이후 마네와 모네를 한 쌍으로 묶어서 언급하기 시작하면서 두 사람은 자연스레 한 묶음으로 언급되었다. 모네는 마네가 주도하는 모임에서 치열한 토론의 중요성을 이렇게 말했다.

"끝없는 견해의 충돌로 이어지는 대화만큼 신나는 것은 없다."

모네는 1869년과 1870년 국전에 낙선하자 더 이상 작품을 출품하지 않았고, 화가들이 모여서 독자적으로 전시회를 열고 ‘새로운 회화’를 보여줄 것임을 언론에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1874년 1월 17일 마침내 화가 조각가 판화가들의 협회 탄생하게 되며, 스스로를 ‘무명협동협회’라고 이름 정한다. 카페 게르부아에 모이던 화가들 대부분이 참석하였다. 하지만 그 동안 리더 역할을 하던 마네는 국전을 고집하면 참석을 하지 않았다. 여러 번 국전에 낙선했음에도 불구하고 마네의 주장은 분명하였다.

"국전이야말로 예술가들에게 실제 싸움터다. 예술가는 인정받기 위해서 마땅히 국전에 출품해야 한다."

제1회 인상주의전으로 미술사에 길이 남게 된 이 그룹전시회에는 30명 회원의 작품 165점 소개되며 피사로, 드가, 르누아르, 카유보트, 부댕, 세잔도 있었다. 이 모임의 리더는 자연스레 모네가 되었다.

평론가 루이 르루아가 ‘인상주의자들의 전시’(the Exhibition of the Impressionist)에서 처음으로 사용하면서 인상주의라는 용어가 하나의 사조로 미술사에 등장한다.

클로드 모네의 작품 ‘인상, 일출’. 여기서 ‘인상주의’라는 말이 탄생하였다.

하지만 르루아는 모네의 ‘인상, 일출’이란 작품을 두고 언급했을 때는 "얼마나 자유로운가, 얼마나 쉽게 그렸는가"라고 빈정거리듯 경멸조로 평가한 것이었다. 헤밍웨이가 첫 출세작 ‘태양은 또 다시 떠오른다’에서 ‘잃어버린 세대’를 언급했을 때처럼 인상주의 역시 처음에는 부정적인 의미였다.

많은 이견에도 불구하고 마네에게 가장 많은 영향 받은 사람은 모네였다. 반대로 작가로서 모네의 재능을 안타깝게 여긴 마네는 그가 생활고에 허덕일 때마다 아무 말하지 않고 돈을 빌려줬다.

인생 후반기 마네는 모네가 보트에 이젤을 고정시키고 센 강을 오르내리면서 강의 풍경들을 그릴 때 찾아가 모네 가족을 화폭에 담았다.

클로드 모네. 그 덕분에 마네의 명작 ‘올랭피아’는 파리에 남게된다.

그런 마네의 은혜를 모네는 잊지 않았다. 마네가 사망한 이후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미망인이 ‘올랭피아’를 미국인에게 팔려는 계획을 밝히자 모네는 프랑스 국민이 마네를 위대한 화가로 기억할 수 있도록 알리는 일에 앞장섰다.

[[미니정보] ‘올랭피아'의 화가 마네와 모네의 우정]

문화 예술계 인사들과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내고 하소연한 끝에 마침내 올랭피아를 비롯한 마네의 그림들을 루브르에 소장할 수 있었다. 현재는 오르세 미술관에 전시 중이다.

마네와 모네, 두 사람은 진정한 리더였다. 카페 게르부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바티뇰의 순례자는 여전히 이어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