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비즈 창간 10주년 기획]

도시재생(Urban Regeneration)은 낡은 건물을 허물고 다시 짓는 재개발·재건축과는 결이 다른 개념이다. 도시의 역사를 보존하면서, 현대인이 생활하는데 꼭 필요한 요소들을 갖추되, 지속가능한 미래까지 고려해야 하는 일종의 재창조 과정이다. 지구촌 곳곳의 거대 도시들은 이미 수십년에 걸쳐 이 숙제를 해왔다. 이제 한국도 이 물결 앞에 마주 섰다. 2020년 창간 10주년을 맞는 조선비즈가 이른바 도시재생의 모범생들을 직접 살펴봤다. 앞서간 이들의 발자국을 참고하면, 쇠락한 도시에 더 활기찬 숨결을 불어넣을 수 있지 않을까.

☞ 인터랙티브 페이지에서 기사 보기
https://news.chosun.com/interactive/urban/index.html?selector=life&index=1

올림픽 계기로 부활한 스트랫포드
임대기업이 시설 인수해 사람 끌어들여
고급 상업시설 들인 킹스크로스역 주민은 불만
주거안정 없으면 도시재생 실패할수도

모처럼 푸른 하늘이 보이던 지난달 28일 오전. 영국 런던의 교통 거점 중 하나인 채링크로스·세인트판크라스 인터내셔널역에서 사우스이스턴열차를 타니 7분 만에 스트랫포드(Stratford) 인터내셔널역에 도착했다. 기차역에서 3분쯤 걸으니 곳곳에 너른 잔디밭이 펼쳐진 깔끔한 건물들이 등장했다. 런던 동부 권역 도시재생 사업 중 성공 사례로 꼽히는 주거단지 ‘이스트 빌리지(East Village) 런던’이다.

런던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을 뜻하는 ‘런던 광역권(Greater London)’은 금융사들이 밀집한 시티오브런던 특별자치구를 포함해 모두 33개자치구(borough)로 구성된다. 스트랫포드는 상대적으로 발전 속도가 더디다는 평을 받아온 동부 권역인 뉴햄(Newham)자치구에 속한다.

이스트 빌리지 런던 안에 조성된 공원에서 자녀와 손주를 돌보는 주민들.

해가 중천으로 떠올랐지만, 여전히 바람이 쌀쌀한 탓에 코트깃을 여며야 하는 날씨가 계속됐다. 이스트 빌리지 산책로와 카페 곳곳에서 조깅하거나 자녀를 데리고 산책을 나온 주민들을 만날 수 있었다. 놀이터에서 만난 영국인 부부 매기와 필은 60대 중반이다. 이 곳에 집을 얻은 아들과 가까이에 살며 어린 손자를 돌봐주기 위해 런던 시내의 집을 처분하고 이사왔다. 맞벌이인 아들 내외는 런던으로 출퇴근한다고 했다.

매기는 "런던 집을 판 돈의 70%로 이스트 빌리지에서 집을 구입할 수 있었다"며 "런던 도심까지 10분이면 갈 수 있는 위치면서도 올림픽 경기장이나 공원 등 생활편의시설이 잘 마련돼 있고 번잡하지 않아 만족하며 살고 있다"고 말했다. 부부는 "아들 가족이 이곳을 떠나더라도 우리 부부는 이스트 빌리지에서 계속 살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덧붙였다.

◇ 올림픽을 기회로 부활한 런던 스트랫포드

스트랫포드가 살기 좋은 지역으로 꼽히게 된 지는 불과 5년이 되지 않았다. 수도 런던의 지근거리에 있는 제조업지구로서 이 지역이 성장한 때는 1960~1970년대. 이후에는 탈산업화에 돌입한 런던의 변화를 따르지 못하고 뒤쳐지기 시작했다. 지역 경제 기반이 무너지고 주민들이 떠난 스트랫포드에는 살 만한 곳이 못된다는 딱지가 붙었다.

런던시는 1990년대 말부터 스트랫포드 도시재생에 관심을 가졌지만, 수 년 동안 추진력을 얻지 못했다. 당장 학교와 병원 등 생활편의시설을 조성하고 주거시설을 재건축하는데 필요한 예산을 마련하는 게 문제였다.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하던 스트랫포드 도시재생 사업이 전환점을 맞은 때는 2005년, 런던이 2012년 하계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되면서다. 올림픽이라는 국가적인 행사는 런던 광역권을 대대적으로 정비할 좋은 구실이었다.

런던광역권에 해당하는 스트랫포드의 주거·상업복합단지로 조성된 이스트 빌리지 런던의 정경.

영국 정부와 런던시 등은 상대적으로 발전이 더딘 런던 동부의 6개 자치구를 올림픽 개최할 장소로 정했다. 우호적인 여론에 힘입어 택지 개발, 재건축, 공원 조성 등을 추진했다. 스트랫포드에도 퀸 엘리자베스 올림픽공원과 경기장, 선수촌 등을 짓기로 결정했다.

런던시는 단순히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할 방안에만 골몰하지 않았다. 올림픽을 치른 후에도 여전히 런던에서 살아갈 시민들의 미래를 함께 고려했다. 올림픽 개막을 넉 달 앞둔 2012년 2월 ‘런던 유산 개발 회사(London Legacy Development Corporation) 설립령’을 공표하고, 올림픽공원과 경기장 등을 지역민들을 위한 기반시설로 꾸준히 활용할 방안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래픽=송윤혜

이스트 빌리지 런던이 탄생한 것도 LLDC가 올림픽 시설을 민간 기업에게 매각해 주거·상업지역으로 활용하기로 결정한 덕이다. 사업성과 자금력, 공공성 등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민간 부동산임대업체 겟리빙(Get Living)에게 스트랫포드 올림픽 부지가 낙찰됐다. 겟리빙은 영국의 부동산투자회사인 델란시(Delancey), 카타르 국부펀드 산하 부동산투자업체인 카타리디아르(Qatari Diar), 네덜란드 국민연금을 운용하는 APG 등의 투자를 유치해 매입자금을 마련했다.

이스트 빌리지 런던은 겟리빙과 공공임대주택기관인 트라이애슬론이 지분을 절반씩 나눠갖고 운영 중이다. 모두 주택 3000가구를 공급했다. 건물 1층은 카페나 주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편의시설들이 입주하게 하고, 단지 곳곳에 놀이터와 공공 휴게시설을 조성했다. 선수촌으로 사용한 건물에는 올림픽 때 머문 대표팀의 이름을 남겨뒀다.

◇ 개발을 불편해하는 시민들… 관심사는 ‘주거 안정·교통 개선’

하지만 모든 런던 시민들이 낡은 건축물을 문화·상업시설로 바꾸는 도시재생 방식에 만족하는 것은 아니었다.

킹스크로스역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인 ‘콜 드롭스 야드(Coal Drops Yard)’는 지난해 10월 문을 연 복합상점가다. 빅토리아 시대부터 철로로 석탄을 운송해 하역하던 시설을 고급 의류와 화장품 매장, 식당가로 바꿨다. 삼성전자 매장도 이곳에 입점했다. 콜 드롭스 야드 개발사업은 런던 구도심 재생사업인 ‘킹스크로스역 중심부 개발 계획(King's Cross Central development scheme)’의 일부다.

런던 킹스크로스역 중심부 개발 계획 중 하나인 ‘콜 드롭스 야드’의 정경.

콜 드롭스 야드의 한 카페에서 만난 런던 주민들은 "이 장소가 너무 비싸고 고급스러운 상점 위주로 바뀌었다"고 불만을 나타냈다. 요리사로 일하는 벤자민이라고 밝힌 30대 남성은 "오래된 건물을 재활용한다는 취지는 좋지만, 관광객을 대상으로 만든 탓인지 지역민에게는 너무 비싸고 고급스러운 가게들만 입점했다"고 말했다. 일행인 롭은 "지금 런던시가 도시재생 정책을 시행하면서 가장 신경써야 할 부분은 주거 안정"이라며 만성 주택 부족과 비싼 주거비 문제를 지적했다.

이곳에서 만난 시민들은 다시 태어난 도시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 주거비는 오르고 실생활과 상관 없는 상업시설만 가득 찬 개발로 삶이 더 힘들어졌다고 느끼는 이가 많은 것. 그저 낡은 건물이나 쇠락한 설비를 현대적으로 리모델링하는 것만으로는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스트랫포드가 주거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반영한 도시재생을 진행한 결과 성공한 것과 대조된다.

사디크 칸(Khan) 런던시장이 지난 2018년 도심부 도시재생 사업 권고안인 ‘부동산 재생(Estate Regeneration)’을 내놓은 것도 이 같은 불만이 꾸준히 제기됐기 때문이다. 권고안에 따르면, 주거시설이 포함된 지역에서 도시재생 사업을 진행할 때는 초기단계에 지역민들의 의견을 수렴해야 한다. 노후 주택을 부수고 다시 짓는 과정에서 원주민들이 쫓겨나거나 주거비용이 급등하는 문제가 생기는 것을 줄이기 위함이다.

피터 비숍(Bishop) UCL 바틀렛건축대학 도시계획학과 교수 겸 런던도시계획연구센터장은 "도시재생에서 건축적인 변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작다. 오히려 사회·경제적인 변화가 더 크다"면서 "훌륭한 도시재생 사업은 무엇보다도 해당 지역에 살던 주민들의 삶을 더 좋은 쪽으로 바꾼 사업"이라고 말했다.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