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가 최근 '고순도 액체 불화수소'의 한국 수출을 4개월 만에 처음 승인했다. 이 화학 물질은 반도체 제조 때 반드시 필요한 핵심 소재다. 일본은 지난 7월 초 불화수소(액체·기체), 포토레지스트,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등 화학 소재 3종에 대한 수출 규제를 강화했는데 그동안 액체 불화수소만 한국 수출을 허가하지 않고 있었다. 일본의 수출 허가는 23일로 예정된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의 종료를 코앞에 둔 시점에 이뤄졌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국제 여론전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빌미를 잡히지 않겠다는 일본의 명분 쌓기"라는 분석이 나온다.

17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일본 경제산업성은 지난 15일 자국 화학 업체 '스텔라케미파'가 제출한 고순도 액체 불화수소의 한국 수출 요청을 허가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7월에 주문한 건이다. 일본 정부는 서류 미비를 이유로 접수를 미루다가 8월 중순에야 접수했고, 수출 심사 기간인 90일 만료를 앞두고 허가한 것이다. 구체적인 물량은 공개되지 않았다.

한 통상 전문가는 "일본 정부는 90일 심사 기간을 딱 지키면서 '소재를 무기화하지 않고 있다'는 메시지를 국제사회에 던진 것"이라고 말했다. 자국의 위험 물질 수출을 관리하는 조치이기 때문에 한·일 간 지소미아 갈등과는 무관하다는 논리다. 실제로 이날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일본 정부는 한국이 지소미아 연장 조건으로 내건 수출 규제 철회 요구에 응하지 않기로 최종 방침을 정하고 미국에 통보했다"고 보도했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이번 일본의 수출 허가로 불확실성이 해소됐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일본이 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을 제외했기 때문에 언제든 특정 물질의 한국 수출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우회로를 통한 일본산 소재 확보 전략을 펴고 있다. 예컨대 일본 소재 기업이 유럽이나 중국에 세운 합작사에서 물량을 가져오는 방식이다. 해외 합작사이기 때문에 일본 정부에 수출 규제 권한이 없다. 국내 반도체 기업의 한 고위 임원은 "일본 화학업체가 벨기에에 현지 업체와 합작사를 세웠는데, 이곳이 일본산과 똑같은 수준의 소재를 생산하고 있다"며 "예를 들면 이런 곳을 대체 수입처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