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부진' 진단, 8개월만에 '성장제약'으로 바뀌어
기재부 "특정지표 부진이 확대 해석돼 정확하게 바꾼 것"
민간선 "부진 표현 거둘 근거 없어…'경기바닥론' 섣부른 판단"

정부의 공식 경기진단서인 그린북(최근의 경제동향)에서 8개월만에 ‘부진’이라는 표현이 사라진 것에 대해 전문가들은 "정부가 섣부른 경기바닥론을 내놓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린북을 발간하는 기획재정부는 가파른 마이너스 흐름을 지속하던 일부 경제지표가 감소폭이 줄거나 멈췄다는 것을 근거로 추가적인 경기하방은 없을 것이라고 진단했지만, 전문가들은 이같은 기재부의 판단에 동의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수출이 이달까지 12개월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정부지출을 제외하고선 경기를 끌어올릴 만한 모멘텀은 관측되지 않고 있어서다.

우리 경기를 좌우할 반도체 회복시기가 불확실하다는 데는 기재부도 동의하고 있다. 이 때문에 '부진'을 뺀 자리에 '성장 제약'을 넣었다. 일각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이 하루 전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에 "경제리더십을 보여달라"고 요청한 만큼 기재부가 청와대의 '바닥론'에 힘을 실어줬다는 의심을 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14일 오전 청와대 여민관 소회의실에서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으로부터 업무보고를 받고 있다.

◇'부진→성장제약' 표현 바꿔…민간선 "'부진' 표현 거둘 근거 없어"

기재부는 15일 발간한 ‘2019년 11월 최근 경제동향(일명 그린북)’에서 "3분기 우리 경제는 생산과 소비 증가세를 유지하고 있으나. 수출과 건설투자 감소세가 이어지며 성장을 제약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지난 4월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 이후 처음으로 그린북에 '부진'이라는 표현이 등장한 지 8개월 만의 일이다. 한 달 전 만해도 기재부는 "우리 경제는 생산 증가세를 유지하고 있으나, 수출 및 투자의 부진한 흐름은 지속되고 있다"고 했었다.

홍민석 기재부 경제분석과장은 "성장세를 제약하고 있다는 표현이 최근 우리 경제 모습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이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성장의 제약의 원인을 꼽으면 수출과 투자의 부진한 가운데 투자에서는 특히 건설투자의 부진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며 "3분기 지표가 나온 시점에서 정확하게 나눠주는게 맞다고 봤다"고도 했다.

그린북에 따르면 투자 중 설비투자가 개선됐고 소비가 증가세를 지속한 것이 경기진단에서 '부진'이 빠진 이유로 파악된다. 9월 기준 설비투자지수는 전월비 2.9% 높아져 전월(1.5%)대비 상승률을 키웠다. 3분기 민간소비(속보치)는 전기대비 0.1%로 증가세를 유지했다. 경기동행지수, 선행지수(순환변동치)도 9월 각각 전월대비 보합, 0.1포인트 상승을 기록했다.

홍 과장은 "대외여건 상 크게 문제가 없다면 추가적으로 경기 하방요인이 작용하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향후 경기흐름에 대해서도 다소 긍정적인 시각을 내비쳤다.

하지만 민간의 판단은 전혀 다르다. '부진'이라는 표현을 거둘 근거가 아직은 부족하다는 평가다. 수출이 이달 1~10일 전년동기대비 20.8% 감소하면서 12개월 연속 역성장할 가능성이 커졌다. 정부가 '소비 증가세 유지'를 언급했지만 3분기 민간소비 증가율은 전기대비 0.1%로 전분기(0.7%)보다 줄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평가하는 우리나라의 경기선행지수(CLI)도 9월까지 28개월 연속 하락해 전체 회원국 중에서 최장기 하락을 기록했다. 한 마디로 경제지표로 놓고 봤을 때 여전히 경기는 부진한 상황에 가깝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경기는 침체된 상태에서 유지를 하고 있는 상황으로 성장세 회복을 언급하기는 어렵다"며 "소비·투자·순수출 등이 부진한 가운데 국내총생산(GDP)구성요소 중 정부지출을 제외하고선 반등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고 했다.

이근태 L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시간이 지나면서 기저효과로 경제지표가 수치상으로 나아지는 할텐데 국내 실물경기가 부진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했다.

조선DB

◇기재부 "특정지표만 '부진'도 '경기부진'으로 해석"…靑 '바닥론' 의식했나

일각에서는 청와대의 '경기바닥론'에 기재부가 힘을 실어준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청와대에서는 경기가 바닥까지 내려와 이제는 반등할 일만 남았다는 일명 '바닥론'을 내세우고 있다. 이호승 청와대 경제수석은 최근 한 언론 인터뷰에서 "올해 성장률이 2%가 될까 말까 한 상황은 단기적인 경기 문제"라면서 "당장 하강하는 국면에서 어려움이 있지만 기다리면 올라간다"고 말한 바 있다. 지난달에는 시장의 위기설에 "무책임하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기재부는 청와대가 이같은 입장을 나타내는 상황에서 매월 그린북 발간할 때마다 '경기부진'이 언급되는데 부담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날 홍 과장은 '부진' 표현을 거둔 배경을 설명하면서 "특정지표에 대한 부진 평가였음에도 전체에 대한 부진평가로 나오는 보도들이 꽤 있었다"며 "그렇게 계속 가는게 바람직한지에 대한 고민도 있었다"고 했다.

한 민간경제연구원 관계자는 "세계적으로 미·중 갈등이 해소되는 데 대한 기대감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우리나라가 회복세를 보인다고 하기는 어렵다"며 "정부는 경기에 대한 기대가 위축되면 소비감소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서 긍정적으로 얘기한 것 같다"고 했다.

하루 전 문재인 대통령이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에 '경제리더십'을 주문한 것도 영향이 있었던 것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문 대통령은 전날 장관 정례보고에서 홍 부총리에게 "한국 경제에 대한 리더십을 지속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 바 있다.

하지만 국가의 경제정책을 총괄하는 기재부가 보다 냉정한 경기진단을 보여줘야 국민들에게 신뢰를 받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과거와 현재에 대한 정확한 경기평가가 차후 정책결정에 중요한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정부는 매년 ‘상저하고’형 경제전망을 발표한 후 나중에 수정하는 오류를 반복하고 있다.

김소영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경기부진이라 보는게 맞는 상황이고 반등 여부는 두고봐야지 안다"며 "'바닥을 쳤다'고 섣불리 해석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