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원 장모(37)씨는 매일 경기도 분당에서 서울 여의도까지 버스로 출퇴근한다. 1시간 반가량 걸리는 그의 출퇴근길을 함께 하는 것은 지난 7월부터 이용 중인 '노이즈 캔슬링(Noise Cancelling)' 기능이 탑재된 이어폰. 일반 이어폰과 달리 버스의 주행음 같은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는 "소음이 싹 사라지니 긴 출퇴근 시간 동안 어학 공부나 클래식 음악 감상을 편하게 할 수 있어 좋다"고 했다.

노이즈 캔슬링은 우리 주변의 소음을 없애거나 줄여주는 음향 기술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음악 애호가들 사이에서나 주목받던 흔치 않은 기능이었지만, 최근 일반 소비자를 겨냥한 제품에 대거 적용되고 있다. 지난달 29일 애플이 출시한 3세대 무선 이어폰 '에어팟 프로'에 이 기술이 적용된 것이 대표적이다.

업계 관계자는 "이동 중에도 음악이나 동영상을 즐기는 사람들이 늘면서 노이즈 캔슬링 제품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면서 "가격대도 하향 추세라 앞으로 더 많은 관련 제품이 등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비행기 조종사 위해 개발된 기술

노이즈 캔슬링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86년이다. 미국의 음향 기술업체 보스(BOSE)가 1978년 미국 정부의 의뢰를 받아 8년간의 연구 끝에 개발에 성공했다. 전투기 조종사와 나사(NASA) 우주인들이 제트 엔진과 로켓 엔진의 소음에 방해받지 않고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보스가 1986년 첫 군용 노이즈 캔슬링 헤드셋을 내놓은 데 이어, 독일 젠하이저가 1984년 루프트한자 항공사의 요청을 받아 첫 민간용 노이즈 캔슬링 헤드셋 'LHM45'를 1987년 내놨다.

헤드폰과 이어폰은 귀에 갖다댄 진동판을 울려 소리를 낸다. 귀를 완전히 틀어막지는 않으므로 자연스럽게 외부의 소음도 유입된다. 노이즈 캔슬링은 이때 외부에서 들어오는 소음과 정반대 형태의 소리 신호를 진동판에 내보내, 진동판이 울리면서 소음을 저절로 삭제(cancel)하게 한다. 쓴 약을 먹고 나서 정반대로 단맛이 나는 설탕을 먹으면 쓴맛이 줄어드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과 비슷하다.

이를 위해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과 헤드폰은 외부에는 주변 소음을 인식하는 고감도 마이크를 장착하고, 내부에는 이 소음의 파장을 분석해 반대되는 음파(音波)를 만들어내는 전자 회로를 갖췄다.

노이즈 캔슬링은 비행기나 지하철 소음 등 규칙적으로 발생하는 소음을 잡는 데 효과적이다. 소음이 줄어든 만큼 음량을 낮출 수 있어 청력 보호에도 좋다. 일부 치과에서는 의료기기 소음을 들으면 공포를 느끼는 환자를 위해 노이즈 캔슬링 기술이 적용된 헤드폰을 쓰기도 한다.

◇무선 이어폰에도 노이즈 캔슬링

노이즈 캔슬링이 적용된 최신 제품으로 삼성전자 자회사인 하만의 무선 헤드폰 'AKG N700NCBT'가 있다. 주변 소음을 없애는 기능뿐만 아니라 교차로 등에서 다가오는 차량을 안전하게 인식할 수 있는 주변 인식(ambience aware) 기능도 탑재했다. 보스가 지난 9월 내놓은 '보스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 700'은 소음을 감지하는 마이크가 전·후면에 2개씩 총 4개 달렸다. 사용자가 원하는 대로 11단계로 노이즈 캔슬링 정도를 조절할 수 있다. 젠하이저도 지난 9월 무선 헤드폰 '모멘텀 와이어리스3'를 출시하며 이 기능을 장착했다. 국내 업체 중에서는 '모비프렌'이 고성능 노이즈 캔슬링 기능을 적용한 헤드폰 'MFB-H5500'을 판매 중이다. 외산 제품에 비해 가격이 저렴한 것이 특징이다.

최근엔 무선 이어폰에도 노이즈 캔슬링 기능이 적용되고 있다. 소니가 내놓은 'WF-1000XM3'는 작은 이어폰 안에 소음을 없애는 프로세서인 'QN1e'를 탑재했다. 아마존도 지난 9월 무선 이어폰 '에코 버즈'를 출시했다. 여기에는 보스의 노이즈 캔슬링 기술이 적용됐다.

소음을 분석해 그 특성을 파악하는 방식, 소음과 반대되는 음파를 만드는 방식은 제조사마다 차이가 있다. 업계 관계자는 "이 때문에 제품마다 성능과 특징이 천차만별"이라며 "업체 간 기술 경쟁도 치열하다"고 했다.

◇고급 자동차의 소음 저감에도 적용

노이즈 캔슬링은 이달 중 출시되는 제네시스의 첫 SUV 'GV80'에도 들어갔다. 자동차가 달리며 발생하는 노면 소음을 실시간으로 줄여주는 기능이다. 현대차는 "이 기술로 3㏈(데시벨)의 소음을 저감할 수 있다"고 밝혔다. 르노삼성의 QM6에도 마이크 3개와 스피커 12개로 구성된 '액티브 노이즈 캔슬레이션' 기능이 탑재됐다.

업계는 노이즈 캔슬링 기술의 적용 범위가 점점 넓어질 것으로 본다. 보스는 지난해 취침용 귀마개 '슬립버드'에 이 기술을 적용했다. 업계 관계자는 "노르웨이·영국·프랑스 등 유럽에서는 100달러(약 12만원)가 넘는 고급 헤드폰 시장의 40% 이상을 노이즈 캔슬링 제품이 차지하고 있다"며 "아직 7%에 불과한 한국 시장은 성장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