벵갈루루=장형태 특파원

'인도의 실리콘밸리' 벵갈루루 시내의 한 공유주방 건물은 1~2층 전체가 커리와 탄두리 치킨 등을 만드는 30여 업체 직원들로 붐볐다. 위생모를 쓴 각 업체 종업원들이 통유리 너머 훤히 보이는 깔끔한 주방에서 조리에 한창이었다. 빨간 유니폼을 입은 음식주문·배달앱 시장 2위 업체인 조마토 직원들이 분주히 음식을 날랐다. 4조각짜리 1인용 피자를 만들어 파는 한국 스타트업(초기 창업기업) 고피자도 이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지난 9월 고피자가 27.8㎡짜리 공유주방에 입점할 때 들고온 건 1000만원짜리 피자 오븐이 전부였다. 냉장·냉동고, 싱크대, 가스레인지 등은 전부 이곳에 있는 걸 그대로 쓴다. 임차료도 따로 없다. 독점 계약을 맺은 조마토에 주문 건당 수수료 20~25%를 내는 조건이다. 지난달 15일 이곳에서 만난 고피자 옥민우 이사는 "지난 4월 벵갈루루 시내에 20㎡짜리 1호점을 개업하면서 우리 돈으로 5000만원이 들었는데 공유주방에 연 2호점 투자비는 오븐 값 1000만원이 전부"라며 "물류·광고·영업망을 갖추기 힘든 해외 스타트업에는 최적의 조건"이라고 말했다.

낮은 규제의 거대 시장 '스타트업 천국'

한국 스타트업들이 인도로 몰려들고 있다. 고피자 말고도 핀테크 업체 밸런스 히어로, 인터넷 영상 쇼핑 업체 아우어, 교육용 앱 스타트업 더플랜지 등 10여개 한국 스타트업이 수도 뉴델리와 벵갈루루를 중심으로 진출했다. 이들은 "14억 거대 시장이지만 신사업 관련 규제가 거의 없는 인도는 스타트업을 하기에 안성맞춤인 '기회의 땅'"이라고 말했다.

고피자의 1000만원짜리 매장을 가능케 한 공유주방만 해도 한국에선 정부가 허가한 일부 업체만 할 수 있다. 인도는 그런 제약 자체가 없다. 인도에선 스마트폰 보급이 본격화된 4~5년 전부터 음식주문앱 서비스가 등장했다. 토종 업체인 스위기와 조마토는 각각 월 3500만건 안팎, 외국 업체 우버이츠는 월 1300만건씩 배달하고 있다. 공유주방은 음식주문앱 시장의 급팽창과 함께 초고속으로 성장했다. 벵갈루루에만 대규모 공유주방이 10개가 넘고 인도 전역에는 1000여개에 달한다. 미국 아마존도 벵갈루루에 공유주방을 차리고 올해 안에 음식 배달 서비스를 시작하기로 했다.

인도는 핀테크 사업의 천국이기도 하다. 한국 스타트업 밸런스히어로는 2017년 한국 업체로는 1호로 전자결제사업자 허가를 따 핀테크 사업에 뛰어들었다. 선불요금제가 보편적인 인도에 2014년 진출해 스마트폰 데이터가 얼마나 남았는지 알려주는 앱으로 모은 7500만 회원이 최고의 밑천이었다. 이철원 대표는 "14억 인구 중 신용카드가 있는 사람이 6000만명뿐"이라며 "신용카드 없는 10억명이 우리의 잠재 고객"이라고 말했다. 밸런스히어로 앱을 통하면 카드가 없는 사람도 신용대출이나 할부 구매를 할 수 있다. 신용카드를 보유한 제3자에게 수수료를 주고 외상 및 할부 대출 등을 제공하는 방식이다. 한국이라면 은행법과 여신전문금융업법 등 수많은 규제에 할 수 없는 사업이다.

아우어는 페이스북·유튜브 등에 제품 광고 영상을 올리고 소비자가 영상과 연결된 온라인 쇼핑몰(아마존)에서 물건을 사는 '비디오 커머스'를 인도에 처음 선보였다. 수질 안 좋기로 악명 높은 현지 시장에서 샤워기 필터가 히트를 치면서, 인도 소비자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고 있다. 더플랜지는 지난해 12월 스마트폰 중독 방지용 앱 '오딩가'를 낸 데 이어 지난 7월 코딩교육앱 '오딩가코딩가' 등을 선보이며 높은 교육열로 유명한 인도 사교육 시장을 파고들고 있다.

한국에선 안 되는 서비스, 인도는 가능

인도는 거대한 시장에 규제가 없어 세계의 자본이 몰리는 창업 대국으로 변모하고 있다. 스타트업이 2만개에 달한다. 중국 후룬연구소 보고서에 따르면 이 가운데 기업가치 10억달러 이상인 유니콘 스타트업이 21개로 중국(206개)·미국(203개)에 이은 세계 3위의 유니콘 대국이다. 아시아권에서도 일본과 중국 자본이 발 빠르게 투자에 나서고 있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2014년 "2024년까지 인도 스타트업에 100억달러(약 12조원)를 투자하겠다"고 선언한 뒤, 인도 최대 숙박 체인 오요(OYO)와 최대 차량공유 업체 올라(OLA) 등에 80억달러를 투자했다. 텐센트·알리바바 같은 중국계 벤처캐피털(VC)이 지난 한 해 인도 스타트업 시장에 투자한 돈은 56억달러나 된다.

한국 스타트업 고피자가 지난 9월 문을 연 인도 벵갈루루 2호점. 이곳은 30여개 업체가 입점한 공유주방으로, 별도의 임대료가 없는 대신 현지 배달앱과 독점 계약을 맺고 수수료를 내면 된다.

작년 100억원 규모였던 한국 벤처캐피털의 인도 스타트업 투자 규모는 올해 1000억원으로 커졌다. 지난 3월 현대기아차가 올라에 3억달러를 투자키로 하는 등 대기업의 투자도 시작됐다. 정보통신산업진흥원과 중소기업진흥공단은 벵갈루루와 뉴델리에 각각 스타트업 공유 사무실을 열고 한국 스타트업의 인도 진출을 돕고 있다. 신봉길 주인도대사는 "올해가 사실상 한국 스타트업의 인도 진출 원년"이라고 말했다.

["스타트업 인디아, 스탠드업 인디아" 모디의 힘]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는 2015년 8월 15일 독립기념일 연설에서 "Start up India, Stand up India(스타트업 인디아, 스탠드업 인디아)"라고 외쳤다. 스타트업으로 인도를 일으키겠다는 것, '창업 입국'이다. 인도인이 CEO로 있는 미국 마이크로소프트구글을 찾아가 대규모 투자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지난해 인도 실업률은 6.1%로, 45년 만의 최고치를 찍었다. 절반 넘는 인구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고 제조업 인프라도 미약하다. 그래서 인도 정부는 제조업 육성 정책인 '메이크 인 인디아'와 스타트업 육성 정책을 국가적 과제로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인도 정부는 창업 기업에 3년간 소득세·법인세 면제, 1000억루피(약 1조7000억원) 펀드 조성 등 창업 진흥책을 내놨다. 지난해에는 외국 회사에 요구했던 최소자본금액 제한도 없앴다. 2016년 스타트업 인디아 정책이 실행된 이후 2년간 1만4600개 스타트업이 출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