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상과학(SF) 영화를 보면 환자 몸 안으로 작은 로봇들이 들어가 병에 걸린 조직을 치료하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의 상상력이 국내에서 실현되기 시작했다. 박종오 한국마이크로의료로봇연구원 원장은 지난달 31일 광주광역시 본원에서 가진 한국과학기자협회 세미나에서 "몸 안에 들어가 병에 걸린 조직을 찾아내고 치료까지 하는 다기능 캡슐 내시경을 개발했다"고 말했다. 연구원은 동물실험에서 효능과 안정성을 확인하고 곧 인체 대상 임상시험에 들어가겠다고 밝혔다.

◇진단·치료 겸한 3세대 캡슐 내시경

이날 김창세 연구부장(전남대 교수)이 보여준 캡슐 내시경들은 길이 28~32㎜, 지름 11㎜로 새끼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작은 크기였다. 캡슐 내시경은 말 그대로 알약처럼 생긴 초소형 내시경이다. 물과 함께 삼키면 기존 내시경 검사 때와 같은 통증 없이 소화기관의 내부를 영상으로 보여준다. 국내에서도 2014년부터 건강보험 적용 대상이 됐다.

유리 용기에 들어있는 다양한 캡슐 내시경들. 카메라로 질병 부위를 찾고(왼쪽) 바늘로 잉크를 주입해 수술 부위를 표시(오른쪽)하거나 회전 칼날로 검사용 시료를 채취(가운데)할 수도 있다. 뒤 모니터에 캡슐 내시경이 동물의 소화기관 안에서 조직을 채취하는 영상이 보인다.

김 교수는 "연구원이 개발한 다기능 캡슐 내시경은 실시간 영상 전송과 함께 치료와 조직 채취까지 가능한 3세대"라고 설명했다. 현재 병원에서 쓰는 캡슐 내시경은 장운동에 따라 이동하며 인체 내부를 촬영하고 나중에 회수해 영상을 확인하는 수동형이다. 자체 구동 능력을 갖추고 무선으로 실시간 영상 전송이 가능한 2세대도 개발됐지만 아직 상용화되지 못했다.

연구진은 외부에서 자기장으로 몸 안의 캡슐 내시경을 움직이는 방식을 택했다. 자석으로 책받침 위의 쇳가루를 움직이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이러면 캡슐 내시경에 배터리를 넣거나 전선을 달 필요가 없다. 자기장은 자기공명영상장치(MRI)에 이용돼 인체 안전성이 이미 검증됐다.

특히 다기능 캡슐 내시경은 여러 모듈을 필요할 때마다 바꿔 장착해 기능을 바꿀 수 있도록 했다. 진단 모듈은 일반 내시경처럼 앞쪽에 카메라를 장착하고 있다. 약물 주입 모듈은 자기장 신호를 받고 두 가지 화학물질을 섞어 가스를 발생시킨다. 이 힘으로 피스톤이 약물을 병이 난 부위에 분사한다. 약물 대신 인체에 해가 없는 잉크를 주입해 나중에 수술할 부위를 표시할 수도 있다.

생검(生檢) 모듈은 한쪽에 회전형 칼날이 있다. 연구진은 돼지 실험에서 자석이 달린 칼날이 회전해 조직을 잘라내고 캡슐 안에 넣는 영상을 보여줬다. 의사가 내시경 검사를 하면서 병이 의심되는 조직을 떼 내는 일을 캡슐 하나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세브란스병원 소화기내과의 방승민 교수는 "기존 캡슐 내시경은 영상 진단만 가능하고 조직을 채취하거나 치료를 하려면 유선 내시경을 다시 사용해야 한다"며 "다기능 캡슐 내시경은 소화기 질환의 진단과 치료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박테리아와 줄기세포 이용한 로봇도

해외에서도 다양한 캡슐 내시경들이 개발되고 있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는 지난 3월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가 발간하는 테크놀로지 리뷰에 하버드 의대가 개발한 캡슐 내시경을 '올해 10대 혁신 기술'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이 캡술 내시경은 3차원 이미지 센서로 장 내부를 보여주는 입체 영상을 만들 수 있다. MIT 연구진은 출혈 부위와 만나면 스마트폰에 신호를 보내는 캡슐 내시경을 개발했다. 카메라 대신 혈액과 만나면 빛을 내는 박테리아 유전자를 캡슐에 담은 것이다.

하지만 진단과 치료를 겸한 캡슐 내시경은 단연 우리나라가 앞서 있다. 김창세 교수는 "일본이 비슷한 기술로 특허를 출원했지만 아직 구체적인 성과를 발표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융합연구정책센터가 지난해 펴낸 보고서에 따르면 2014~ 2015년 마이크로의료로봇 특허 출원과 논문 발표에서 한국이 세계 1위였다. 보건복지부는 4년간 229억원이 투입되는 마이크로의료로봇 실용화 기술개발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마이크로의료로봇연구원이 주축이 돼 서울대와 전남대, 연세대 등 여러 의대 연구진들도 참여하고 있다.

박종오 원장은 "캡슐 내시경 등 마이크로의료로봇은 한국이 강점을 가진 특화 전략 기술"이라며 "올 연말까지 생명체와 결합한 하이브리드 마이크로로봇에서도 연구 성과가 이어질 전망"이라고 말했다. 박 원장은 2013년 독성을 없앤 식중독균에 항암제를 달아 조종하는 기술을 개발했고, 박석호 전남대 교수는 2016년 면역세포 안에 치료용 미세 입자를 넣은 하이브리드 로봇을 개발했다. 마이크로의료로봇연구원은 줄기세포를 환부에 전달하는 마이크로 로봇을 개발해 2017년 20억원의 기술료를 받고 미국 기업에 이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