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 시대, 미래 산업의 원유(原油)가 바로 데이터입니다. 데이터 경제 시대를 맞아 규제를 풀어 데이터 고속도로를 구축하겠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8월 말 경기 성남시 판교스타트업 캠퍼스에서 빅데이터 산업 발전을 가로막는다는 비판을 받아온 개인 정보 활용 규제를 대폭 완화하겠다며 이렇게 선언했다. 3개월 뒤인 11월에는 정부·여당이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의원입법 형식으로 '데이터 3법'(개인정보보호법·신용정보법·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을 국회에 잇따라 발의했다.

1년 2개월 뒤인 지난 28일, 문 대통령은 네이버 개발자 콘퍼런스 행사에 참석한 자리에서 "데이터 3법이 연내 통과될 수 있도록 국회와 적극 협력하겠다"고 말했다. 그동안 입법이 진행되지 않았다는 점을 실토한 셈이다. 심지어 해당 법안들은 국회 소관 상임위 문턱도 못 넘었다. 스타트업 업계에서는 "입으로만 혁신을 외치는 정부와 민생에는 관심 없는 국회가 한국의 미래를 가로막고 있음을 보여주는 전형이 데이터 3법 처리 과정에서 나타난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1년간 심사 안 한 상임위도

신용정보법 개정안이 상정된 국회 정무위 법안1소위에선 지난 24일에야 해당 법안에 대한 첫 심사가 열렸다. 그동안은 제안 설명만 듣고 끝내왔다. 이 회의에서 의원들은 구체적인 법안 내용을 놓고 이견을 보였다. 이날 결론은 "심도 있는 심사를 위해 계속 논의토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대통령 뜻을 받들어야 하는 행정부도 다르지 않다. 손병두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은 이날 "국세청과 행안부가 납세와 관련된 정보를 제공해줘야 하는데, 저희가 정부 내부 협의를 충분히 완료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이 상정된 국회 과방위는 아예 한 번도 해당 법안을 심사하지 못했다. 데이터 3법의 모법 격인 개인정보보호법 개정안이 먼저 행안위에서 통과돼야 한다는 이유를 들었다.

개인정보보호법 개정안이 상정된 국회 행안위 법안소위는 지난 4월 초 처음 열렸지만, 당시 의원들은 "내용이 방대해 숙지가 안 됐다"면서 통과시키지 않았다. 9월 말과 10월 초에 다시 법안소위가 열렸지만, 결론은 "의견 수렴이 더 필요하다"였다.

국회가 이처럼 데이터 3법을 제대로 심사하지 않은 것은 그동안 여야가 각종 정치 사안을 둘러싸고 정쟁(政爭)을 벌이는 데 시간을 소모했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의 조해주 중앙선관위 상임위원 임명 강행(올 초), 손혜원 무소속 의원의 부친 국가유공자 특혜 논란(3~8월), 선거법 패스트트랙(신속 처리 안건) 충돌(4~7월),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사태(8~10월 중순) 등 때문에 국회가 파행하면서 제대로 상임위를 진행하지 못한 탓이 컸다. 만약 데이터 3법이 이번 정기국회 또는 12월 임시국회 때까지 통과되지 않으면 내년 4월 총선 이후 임기가 끝나는 20대 국회와 함께 자동 폐기될 가능성도 있다.

신율 명지대 정치학과 교수는 "미국 오바마 전 대통령만 해도 재임 당시 자신의 '오바마 케어'(전 국민 의료보험 정책)를 정치권이 반대하자, 직접 야당과 접촉하거나 만나서 설득하는 모습을 보였다"며 "하지만 문 대통령은 말로만 국회를 향해 법안 처리를 요구하는 모양새"라고 말했다.

국회 상황에 속 타는 기업들

급한 건 기업들밖에 없다. 데이터 3법이 제때 통과되지 못하면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 산업 육성은 제약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AI 분야는 이를 뒷받침하는 빅데이터 활용을 규제하면서 우리나라가 미국과 유럽은 물론, 중국에도 크게 뒤처진 상황이다.

국내의 한 뷰티 스타트업은 최근 온라인 판매 시스템을 클라우드(가상저장 공간)로 전환하려다 현행법 때문에 포기했다. 자사 웹사이트 회원들의 개인 정보와 구매 정보를 전문 클라우드 기업에 맡겨 빅데이터 분석을 받으려 했지만, 현행법상 개인 정보를 외부 기업의 클라우드로 보내려면 회원들에게 일일이 동의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금융회사와 핀테크 회사들 역시 데이터 3법 통과를 기다리고 있다. 금융 사기에 사용된 전화번호와 계좌번호 정보를 수집해 사기 예방 서비스를 제공하는 한 스타트업은 개인정보보호법에 묶여 제대로 사업을 진행하지 못하고 있다. 현행법상 사기꾼이 이용 중인 것으로 의심되는 계좌도 이 계좌 주인 동의 없이는 계좌번호 등 개인 정보를 함부로 제공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법적 불확실성이 확실하게 풀려야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데이터 활용에 들어갈 수 있다"며 "그러지 않으면 혁신적 서비스 개발이 그만큼 늦어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