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3일 개봉한 영화 '82년생 김지영'은 당일 관객수(13만8763명)와 예매율(47.7%) 모두 1위를 기록하며 화제를 모으고 있다. 그런데 이 영화 흥행에 남몰래 웃음 짓는 특별한 투자자들이 있다. 최근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인 '와디즈'에서 진행한 국내 영화 3편(82년생 김지영, 사자, 천문) 포트폴리오 투자에 참여한 개인들이다. 와디즈에서 약 2주간 진행된 모금에는 투자금 7억원이 몰리며 마감됐다.

이 영화는 같은 이름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해 개봉 전부터 두꺼운 팬층이 존재했다. 이 소설을 즐겨 읽은 팬들을 중심으로 '덕질'과 '투자'를 동시에 한 것이다. 덕질이란 '오타쿠(オタク)'라는 일본어에서 나온 말로, 연예인이나 영화·만화 등에 애정을 쏟는 걸 뜻한다. 여태껏 영화 같은 대중문화 콘텐츠는 주요 기관 투자자만 참여했으나, 인터넷 플랫폼을 통한 투자가 가능해지면서 일반 팬도 10만원 정도의 소액으로 투자할 수 있는 길이 열리고 있는 것이다.

◇'덕업 일치'에 이어 '덕투 일치'

최근 젊은 층을 중심으로 이처럼 취미를 즐기면서 돈까지 벌겠다는 '덕투'가 많아지고 있다.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갖는다는 뜻의 신조어 '덕업 일치'에 이어 '덕투 일치'를 추구하는 사람도 생기는 것이다.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는 지난 2016년 370만 관객을 불러모은 일본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이 꼽힌다. 이 영화에 투자한 소액 투자자들은 기본 수익률(연 10%)에 관객 수에 따른 추가 수익률 70%까지 올리면서 총수익률 80%라는 대박을 터뜨렸다.

인기 음악 페스티벌인 '그린플러그' 10주년 공연은 투자자 모집 하루 만에 약 9억원이 몰리며 마감됐다. 투자자들은 5개월 만에 원금에 14% 이자까지 더한 돈을 돌려받았다. 와디즈 관계자는 "주로 과거 페스티벌에 참여한 적 있는 팬층 위주로 투자에 참여한 것으로 안다"고 했다.

순수 예술 영역까지 투자 대상이 확대되고 있다. 핀테크 업체 '핀크'는 '아트 투게더'와 협업해 최근 플랫폼 내에서 미술품에 1만원 정도로도 지분 투자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림의 주인이 된 투자자들은 오프라인 전시회가 열리면 자유롭게 감상할 권리도 갖는다. 최근 극사실주의 화가 '두민'과 미술 인공지능(AI) '이메진 AI'가 협업한 작품에는 2000여만원의 투자금이 모였다.

운동화 마니아들이 자신이 소장한 인기 운동화를 팔아 돈 버는 '스니커테크'도 인기다. 이미 미국에서는 주식 시세처럼 인기 운동화 시세를 제공하는 업체 '스탁엑스'가 기업 가치 1조원 이상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지난달 '엑스엑스블루'라는 운동화 경매 사이트가 문을 열었다. 올해 5월 출시된 한정판 운동화 '나이키 조던1 트레비스 스콧'이 발매가(23만9000원) 대비 9배 넘는 220만원에 거래되는 등 대박 사례도 나오고 있다.

'팬심' 발휘의 기회로 삼기도

덕투의 매력은 금전적 수익에서만 찾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나 콘텐츠 제작자 등에게 돈이 간다는 것만으로도 보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작권 공유 플랫폼인 '뮤지코인'은 매주 새로운 곡의 저작권료 지분을 경매 방식으로 판매하고 있다.

좋아하는 가수를 응원하면서 수익까지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셈이다. '국민 노래방 18번'으로 꼬박꼬박 저작권료가 나오는 임창정의 '소주 한 잔' 등이 대표적인 대장주(株)로 꼽힌다. 회원들의 평균 저작권료 수익률은 지난해 기준으로 12.4%에 달한다. 아이돌 그룹 모모랜드의 '짠쿵쾅'은 경매 시작가(1000원)의 65배인 6만5000원에 낙찰되기도 했다. 뮤지코인 관계자는 "좋아하는 노래에 투자하니 돈도 벌고 노래에 대한 애정도 더 생긴다는 팬이 많다"고 했다.

'투자'에 성공하면 수익금 대신 음반이나 책 등으로 돌려주는 덕투 상품도 있다. 보상형 크라우드 펀딩으로 부른다.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인 '텀블벅'이 대표적이다. 인디밴드처럼 시장성이 낮아 새 음반을 못 내는 가수에게 팬들이 돈을 모아주고 실물 음반을 받는 경우, 연재가 종료된 웹툰이 팬들의 후원으로 부활하는 경우 등이 대표적이다. 업계에서는 수익과 보람을 챙길 수 있다는 장점을 바탕으로 '덕투'가 성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해당 분야의 전문가나 다름없는 팬이라면 흥행 상품을 가려낼 '촉'도 있기 때문이다. 신혜성 와디즈 대표는 "투자에 성공하려면 잘 아는 상품에 투자해야 하는데, 좋아하는 분야가 곧 잘 아는 분야"라면서 "좋아하는 데 투자하는 것만큼 확실한 투자가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