췌장암으로 진단받고 2년 이상 생존하는 환자는 15%에 불과하다. 미국 보스턴의 베스 이스라엘 여전도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는 54세 환자 마거릿 슈바르잔은 그중 한 명이다. 진단 후 2년 반을 더 살고 있다. 그에게는 다른 환자에게 없는 새로운 무기가 있다. 바로 자신을 대신해 항암제를 시험하는 미니 장기(臟器)인 '오가노이드(organoid)'다. 장기를 콩알만 한 크기로 축소했다고 보면 된다. 조셉 그로스먼 박사는 환자의 암세포로 만든 오가노이드로 사전에 항암제를 시험하고 있다.

오가노이드가 질병 치료와 신약 개발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다. 지금까지 신약은 동물실험과 인체 대상 임상시험을 거쳐 개발됐지만 환자마다 효능이 다르게 나오는 문제가 있었다. 심하면 약효는커녕 부작용이 더 심한 경우도 있다. 환자의 아바타(분신)인 오가노이드로 어떤 항암제가 효과가 있을지 미리 시험하면 그런 문제를 막을 수 있다. 말 그대로 맞춤형 암 치료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사람과 동물, 심지어 멸종한 네안데르탈인의 오가노이드를 만들어 인류 진화 과정을 연구할 수도 있다.

항암제 시험 대신하는 미니 아바타

네덜란드 암연구소의 에밀 보이스트 박사 연구진은 지난 10일 국제학술지 '사이언스 중개의학'에 암환자의 세포로 만든 오가노이드로 항암제의 효능을 시험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대장암 환자 61명에게서 암 조직 67개를 채취했다. 이를 3주간 키워 최종적으로 35개의 오가노이드를 얻었다. 시판 중인 대장암 치료제를 6일간 오가노이드에 투여했다. 그 결과를 환자가 같은 약을 복용했을 때와 비교했다. 약물의 효과는 10명 중 8명에서 오가노이드와 실제 환자가 일치했다.

제약사들은 최근 동물실험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신약을 시험해볼 다른 방법을 찾고 있다. 과학자들은 2000년대 후반부터 인체 세포를 작은 플라스틱 칩에 배양한 장치를 개발했다. 미세 통로로 혈액과 약물을 보내고 세포의 반응을 보는 방식이다. 허파 칩에서 시작해 심장, 대장, 신장, 태반 등 다양한 장기 칩이 개발됐다.

오가노이드는 장기 칩의 업그레이드판이다. 세포는 평면인 배양접시에서 자랄 때와 인체 안에서 입체로 자랄 때가 다르다. 당연히 약물 반응도 차이가 난다. 과학자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몸 안에서처럼 장기 세포를 입체 형태로 키우면서 동시에 장기에 있는 여러 조직을 만들어냈다. 이를테면 간을 이루는 간성상세포, 쿠퍼세포와 혈관과 담즙 분비관을 모두 구현하는 것이다. 덕분에 약물 시험에서 실제 인간을 대신할 수 있게 됐다.

미니 장기들 연결해 시험 효과 높여

오가노이드는 다양한 방법으로 만든다. 먼저 장기 세포를 묵 같은 형태인 하이드로겔에 섞고 빛을 쪼여 장기 형태대로 만드는 방법이 있다. 3D 프린터도 이용된다. 프린터의 잉크 대신에 장기의 여러 세포를 넣고 점점이 뿌려 쌓아가며 미니 장기를 만든다. 최근에는 장기 세포 대신 줄기세포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2012년 야마나카 신야 일본 교토대 교수가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유도만능줄기세포 방식이다. 피부 세포를 원하는 장기 세포로 바꾼 다음 오가노이드로 키운다.

여러 장기 오가노이드를 하나로 연결하는 연구도 활발하다. 미국 코넬대 연구진은 간과 척수, 암 오가노이드를 하나로 연결해 항암제를 시험했다. 인체가 복용한 항암제는 장에서 흡수되고 간에서 처리된다. 나중에는 신장으로 배설된다. 항암제의 효과를 보려면 암 오가노이드뿐 아니라 간, 대장, 신장 오가노이드도 다 필요하다. 약물 효과를 알아보는 방법도 발전했다. 하버드대 연구진은 오가노이드들이 미세 통로로 연결된 칩에 전극을 연결했다. 전극 표면은 특정 물질과 결합하는 항체로 덮었다. 항체가 검출하려는 물질과 결합하는 전기저항이 달라져 감지할 수 있다.

국내에서는 한국생명공학연구원의 정초록 박사팀이 다중(多重) 오가노이드 장치를 연구하고 있다. 정 박사는 "내년까지 간과 대장, 신장 오가노이드들을 하나로 연결한 약물 시험 장치를 개발할 계획"이라며 "앞으로는 환자의 암 오가노이드까지 결합해 명실상부한 맞춤형 약물 시험이 가능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고려대 정석 교수는 췌장 오가노이드를 만들어 동물을 대상으로 당뇨병 연구를 하고 있으며, 단국대 치대 김형룡 교수는 치아 오가노이드를 만들고 있다. 한국오가노이드학회 회장인 김 교수는 "우리나라는 줄기세포로 장기 세포를 분화시켜 오가노이드로 성숙시키는 기술은 선진국의 70% 수준"이라며 "하지만 암환자 오가노이드 은행을 만들어 운영하는 수준은 30%에 그쳐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