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에서 인테리어용 벽지 납품 사업을 하던 박모(44)씨는 한 달 전 사업을 접고 구직자 신세가 됐다. 한때는 직원 여섯 명에 연 매출 6억~7억원씩 올리던 사장님이었다. 그러나 몇 년 새 미분양이 쌓이고 유통·산업 단지 조성 계획도 줄줄이 엎어지면서 벌이가 반의 반 토막 났다. 직원을 한두 명씩 내보내다 보니, 올 들어선 급기야 혼자 남았다. 그는 '바닥 밑 지하실'을 헤매는 울산의 지역 경기 직격탄을 맞은 수많은 울산 사람 중 한 명이다.

임대 광고만 수두룩 - 지난 14일 준공한 지 4년이 넘은 울산 중구의 한 신축아파트 단지 인근 상가. 오가는 이도 없고, 세입자를 못 구해 1층 전체가 텅 비어 있다. 유리창엔 분양 임대 광고만 수두룩하다.

어떤 메뉴를 팔아도 '월천(월수입 1000만원)'은 쉽게 가져간다는 경남권 최고 먹자골목 울산 달동 음식점 거리. 지난 14일 오후 찾아간 이곳엔 드문드문 '임대' 안내장이 나부꼈다. "이 코너 족발집은 권리금 2억에도 가게 하겠다는 사람이 줄 섰던 자리거든예. 근데 결국 내놨네예. 요즘 여기 사장들은 누가 가게 팔고 나간다 하면 '권리금이라도 받고 나가니 부럽다'면서 축하해준다 아입니꺼." 여기서 치킨집과 어묵탕집을 하는 박모(42)씨가 말했다. 작업복 입은 중공업과 자동차 회사 근로자들이 2차, 3차까지 마시며 돈을 뿌려대던 곳이지만, 지금은 딴 세상 얘기가 됐다.

한국 경제가 디플레이션(deflation·경기 침체 속 물가 하락) 초입에 들어섰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정부와 청와대는 "우리 경제는 선방하고 있다. 디플레를 논하는 건 무책임한 태도"라고 강변하지만, 이미 디플레가 찾아온 곳이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우리나라를 먹여 살리던 공업도시 울산이다.

◇성장이 멈춘 도시, 울산

전국 물가상승률은 8~9월 두 달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했지만, 울산은 이미 8개월째 마이너스다. 올해 2월부터 9월까지 물가가 마이너스였다. 울산의 9월 물가상승률은 -1.0%로 광역시·도 16곳 중 제일 낮았다. 디플레는 물가가 힘없이 떨어지면서 경제가 활력을 잃고 장기 저성장의 늪에 빠지는 상황을 말한다. 일본이 '잃어버린 20년' 동안 겪은 바로 그 장기 불황이다. 소리 없이 다가와 경제를 망가뜨린다고 해서 '침묵의 살인자'라고 부른다.

울산은 성장이 멈춰버린 지 오래다. 2011년 경제성장률 7.9%를 기록한 이후 2016년까지 연평균 성장률이 0.5%에 그쳤다. 2017년엔 급기야 -0.7%의 역성장을 했다. 중공업·자동차·정유 등 주요 수출 산업이 견인하는 경제라 수출 사정이 나쁠 때면 경기가 흔들리곤 했지만, 요즘처럼 장기간 침체 국면에 빠진 적은 없었다. '수출 한국'이 최근 미·중 무역 분쟁과 일본 수출 규제 등에 휘청거리는데, 울산은 딱 한국의 축소판이다. 이곳은 물가 하락과 성장률 둔화만 지속되는 게 아니라 부동산 같은 자산 가격 하락 현상까지 동반해 '일본식 디플레'에 근접했다는 분석이다.

한국감정원에 따르면 울산 아파트값은 2017년 4월부터 올 9월까지 29개월 연속 하락세다. 4억원에 분양됐던 30평대 집값이 3억원으로 떨어졌고, 3억원짜리 전세는 2억원 언저리다. 일본도 1980년대 후반 금리 인하 이후 과열됐던 부동산 시장 거품이 한꺼번에 꺼지면서 디플레로 가속 페달을 밟았다. 울산 중구의 한 부동산중개업소 대표 배모씨는 "울산 집값이 워낙 바닥이라는 소문이 전국적으로 퍼져 일부 외지인이 기웃거리고 있지만, 아직 준공 후 미분양이 남아 있을 정도로 분위기가 안 좋다"고 했다.

◇숫자보다 더 참혹한 현실

울산 사람들은 성장이 멈춘 도시에서 앞으로 뭘 먹고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다. 반도체·자동차 등 몇 가지 주력 산업 수출에 의존해 온 한국 경제가 시작하는 고민과 똑같다. 올 들어 인구는 7000명 넘게 빠져나갔고, 돈 있는 울산 사람들은 부산으로 원정 소비를 떠나고 있다. 이런 상태가 계속되면 결국 일본처럼 가계 소득, 기업 소득이 줄어 각종 사회문제가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

소비자들이 앞으로 1년간 물가상승률을 전망한 '기대 인플레이션율'은 올 초만 해도 2.3%였지만 9월을 기점으로 1%대(1.8%)로 꺾였다. 많은 사람이 경제를 어둡게 보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하준경 한양대 교수는 "국가 전체적으로 볼 때 디플레를 얘기할 상황은 아니지만, 모든 사람이 디플레를 걱정하는 상황으로 몰리면 위험해진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디플레 진입 초기에 단기 미봉책만으로 경기를 띄우려다 장기 불황에 빠진 일본 같은 전철을 밟아선 안 된다고 지적한다. 일본 경제 전문가인 이부형 현대경제연구원 이사는 "1995년 일본의 연간 물가상승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했는데, 일본은행은 그로부터 6년 뒤인 2001년에야 디플레를 선언해 때를 놓쳤다"면서 "지금은 디플레냐 아니냐 소모적 논란을 벌일 때가 아니라, 상황을 최대한 보수적으로 보고 할 수 있는 모든 대책을 강구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