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원이 60여 명인 중소 인쇄 업체 A사는 최근 회사를 직원 30여 명짜리 법인 둘로 쪼갰다. 내년 1월부터 50명 이상 300명 미만 사업장에도 적용되는 주 52시간제를 피하기 위해서다. 업계 관계자는 "신학기 교과서 일감이 몰리는 연말·연초는 하루 24시간 공장을 돌려야 하는 극성수기"라며 "주 52시간을 지키면서 납기를 맞추려면 사람을 늘려야 하는데 방법이 없다"고 했다. 그는 "52시간제를 통해 일자리를 늘리라는 건 우리 같은 중소기업에는 비현실적인 얘기"라고 말했다.

내년 주 52시간제의 중소기업 확대 적용을 앞두고 정부는 보완을 검토하고 있지만, 정부를 믿지 못하는 일선 기업들은 이미 '각자 알아서' 살길을 찾고 있다. 결론은 "편법이나 탈법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인력·자금난에 편법 내몰려

금속 열처리 업체 B사는 지난 7월부터 노사 합의로 주 52시간제를 시범 도입했다. 노사가 함께 대안을 찾자는 취지였다. 하루 2교대, 주 72시간씩 일하던 생산직 80명이 3교대로 주당 48시간씩 일하게 됐다. 부족한 30~40명의 일손은 용역 파견업체를 통해 충원하기로 했다. 용역 업체가 보내온 사람들을 본 회사 관계자는 당황했다. B사 기존 직원이 상당수 있었기 때문이다. 400만원 넘던 월급이 200만원대로 줄어든 직원들이 쉬는 날 파견직 신분으로 나타난 것이다. 회사로선 같은 직원이 같은 일을 하는데 파견 업체에 수수료 10%를 줘야 하지만, 익숙한 인력을 그대로 쓸 수 있어 편법을 감수하고 있다.

수도권의 인쇄 전문업체 C사는 '직원 맞교환'이라는 대안을 마련했다. 동종 업계 지인의 회사 D사와 추가 근무를 원하는 직원들을 서로 교환하는 것이다. 근로시간을 줄이려면 2교대를 3교대로 바꿔야 하지만 매출이 매년 줄어드는데 인력을 더 뽑을 수 없었다. 추가 근무를 원하는 C사 직원들은 주 4일 정도만 회사에서 근무하고 주말에는 D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D사도 마찬가지다. 교환 근무자들에겐 '기밀 유지' 서약도 받았다고 한다.

주 52시간제를 시범 도입한 제주의 건설사 E사 대표는 최근 밤에 대리운전을 신청했다가 기사로 온 자기 회사 직원을 만났다. 근로시간 단축으로 줄어든 임금을 벌충하려고 '투잡'을 뛰고 있는 것이었다. E사 대표는 "젊은 직원들은 급여가 30% 정도 줄었다"며 "주 4~5일만 일해도 먹고살 수 있게 해줘야 하는데 직원들에게 너무 미안하다"고 했다. 다른 지방의 건설업계 관계자는 "직원들에게 '월요일 근무는 지장이 없도록 일요일에는 대리운전을 밤 10시까지만 하라'고 부탁하는 게 일이 됐다"고 말했다.

직원 80명인 주물 업체 F사는 내년 생산 물량을 동결하기로 했다. 새 인력을 뽑을 형편은 안 되는데 내년 근로시간까지 단축하면 납기일을 맞출 수 없기 때문이다. 중소기업 대표들 사이에선 "임금 감소를 걱정하는 근로자들이 올 연말 무더기로 퇴직금 중간 정산을 요구하면서 기업들이 자금난에 빠질 수도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中企 56% 준비 안 됐다"

김기문 중기중앙회장은 이달 초 문재인 대통령 간담회 때 "고용노동부는 300명 미만 중기 39%만 주 52시간제 준비가 안 됐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56% 기업이 준비가 안 됐다"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1일 주 52시간 제도 확대와 관련해 "보완책을 마련해달라"고 말했다. 같은 날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이달 중 주 52시간 근무제 보완책을 발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은 14일 간담회에서 "주 52시간제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현장 애로사항에 대한 해결 방안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미 혼란에 빠진 중소기업들은 시행 연기뿐 아니라 아예 도입 반대도 주장하고 있다. 지금 검토되는 보완책은 계도 기간 운영, 감소 임금 보전 지원 등으로 알려졌다. 많은 중소기업은 이에 대해 "미봉책일 뿐"이라며 "근본적인 해결은 근로시간 단축 전면 재검토"라고 말하고 있다. 노민선 중소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정부가 빠른 의사 결정으로 기업들의 불확실성을 줄여줘야 한다"며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중소기업들이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게 돕는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