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앤젤레스=박순찬 특파원

미국은 디즈니, 마블, DC코믹스의 나라다. 명실상부한 애니메이션·만화의 본고장이다. 이를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세계 캐릭터 시장 역시 미국이 장악하고 있다. 애니메이션·만화 시장의 차세대로 꼽히는 장르는 '웹툰(디지털 만화·webtoon)'. 앞으로 얼마나 크게 성장할지 알 수 없는 미국의 웹툰 시장을 한국 네이버가 선점했다. 지난 5년간 적자를 감수하며 투자를 지속한 덕분이다.

12일(현지 시각)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만화 축제 'LA 코믹콘 2019'. 만화 팬 13만명이 찾은 이 행사에서 네이버웹툰의 성장세를 확인할 수 있었다. 네이버웹툰 미국 지사 웹툰엔터테인먼트의 34평(111㎡)짜리 부스에는 팬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네이버의 인기 웹툰 '로어 올림푸스(Lore Olymp us)'를 창작한 레이철 스마이스(33)의 사인회에는 400여명이 줄을 섰다. 뉴질랜드의 그래픽 디자이너였던 레이철은 2017년 네이버웹툰을 통해 작가로 전업했고 지금은 인기 스타다. 그의 작품을 구독하는 팬은 270만명. 사인을 받은 릴리(Lilly·22)씨는 "한 시간 동안 줄을 섰지만 너무 행복하다"고 했다. 네이버웹툰이 억대 연봉을 올리는 신진 웹툰 작가를 발굴하고 수백만 팬을 집결시키는 플랫폼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는 것이다.

한국 포털에서 글로벌 플랫폼으로

네이버가 한국에서 온라인·스마트폰에 최적화된 만화인 웹툰을 서비스하기 시작한 것은 2004년이다. 해외시장 진출에 나선 것은 2014년. 이후 5년간 꾸준히 미국, 일본, 동남아 등 주요 시장에 투자했다. 그 결과 세계 100여국에 웹툰 플랫폼을 깔고 58만명의 아마추어 웹툰 작가를 보유한 자체 생태계를 만들었다. 현재 월간 이용자 수는 6000만명이다. 스마트폰 앱은 구글·애플이, 동영상은 유튜브가, 웹툰은 네이버가 장악한 것이다.

만화 주인공 같죠? 네이버 웹툰 작가와 팬들 - 12일(현지 시각)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열린 ‘LA 코믹콘 2019’에서 네이버 인기 웹툰 ‘로어 올림푸스’의 작가 레이철 스마이스(가운데 앉은 사람)가 자신의 웹툰 주인공 분장을 하고 온 팬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처음 미국에 진출했던 5년 전, 네이버는 막막했다. 국내에서는 1위 포털이었지만 미국에서는 존재감도 없었다. 네이버웹툰 김준구 대표는 "미국 시장에서 신뢰를 쌓는 게 가장 어려웠다"고 했다. 현지에서 만화 작가들에게 "우리 네이버인데 만화 올리면 돈 주겠다"고 했더니 당장 "사기 아니냐"는 말을 들었다. 직원을 뽑을 때는 "혹시 납치될지 몰라 부모한테 얘기하고 왔다"는 지원자까지 있었다. 회사는 이들을 비행기 태워 한국의 네이버 본사를 보여주고 광고 수익 분배, 팬 미팅과 같은 혜택을 제공하며 조금씩 마음을 얻었다.

성공 비결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우선 '한국의 10년 웹툰 경험'으로 시장을 파고들었다. 둘째로 철저한 현지화를 시도했다. 한국 인기 웹툰을 번역해 서비스하면서 현지 작가를 발굴, 각국 문화 코드에 맞는 작품을 배출한 것이다. 김 대표는 "현지 작품이 인기를 끌면서 한국 웹툰이 다시 낙수(落水) 효과를 보는 선순환도 나타났다"고 했다.

해외에서만 월 1억원씩 수익을 올리는 한국 작가들도 생겨났다. 성인 남성을 겨냥한 수퍼히어로물이 즐비한 미국 시장에서 14~24세, 여성을 공략한 로맨스물을 집중 제작하며 차별화를 꾀했다. 한국에서 성공한 유료 모델 '미리 보기'도 해외에서 그대로 작동했다. 일주일에 한 편씩 무료로 웹툰을 보여주지만, 다음 회가 궁금한 사람이 돈을 내면 볼 수 있도록 만든 것이 미리 보기다.

진출 초기 100만명에도 못 미쳤던 월 이용자는 현재 900만명을 넘어섰다. 연내 1000만명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이용자 75%가 24세 이하, 이른바 'Z세대'다. 네이버 창업자인 이해진 글로벌투자책임자(GIO)의 목표는 '미국 젊은이들의 메인 스트림 서비스가 되자'는 것. 미국 웹툰 사업을 총괄하는 김형일 리더는 "미국 Z세대가 5600만명쯤 되는데 그중 5분의 1이 이용한다"며 "Z세대가 자주 쓰는 앱 10위에 드는 것이 목표인데 현재는 40위 수준"이라고 했다.

목표는 '글로벌 디지털콘텐츠社'

즐기며 일하는 '덕후(한 분야에 깊이 빠진 사람)'가 사업을 주도한 것도 셋째 성공 요인이다. 이해진 GIO부터 자타공인 '만화 덕후'다. 시간만 나면 만화를 본다. 그는 지난 2014년 미 서부 샌디에이고에서 열린 코믹콘도 방문했다. 국내 웹툰 인기 작가가 휴재(休載)하면 "대체 언제 다시 연재하느냐"고 사업 부서에 물어볼 정도다. 네이버웹툰이 해외 진출을 결정했던 2014년 당시 네이버 최고경영자(CEO)였던 김상헌 전 대표 역시 만화·피겨(모형 장난감) 마니아다. 네이버웹툰 김준구 대표와 미국 콘텐츠사업 총괄인 데이비드 리 등도 원래 네이버 본사 개발자였다가 만화가 좋아 웹툰 부문에 합류해 사업을 이끌고 있다.

네이버의 꿈은 단순히 '세계 1위 웹툰 플랫폼'이 아니다. 웹툰을 중심으로 한 글로벌 콘텐츠 유통·제작사가 되는 것이 목표다. 미국 인기 웹툰 '로어 올림푸스'의 판권으로 미국 유명 제작사인 짐 헨슨 컴퍼니와 TV 애니메이션을 만들기로 한 것이 대표적이다. 미국 웹툰을 발판 삼아 연내 유럽 시장에도 진출한다. 김형일 리더는 "유명 소설 판권을 사서 웹툰으로 바꾸고, 웹툰을 영화·드라마 등 다양한 콘텐츠로 변환시키는 다양한 실험을 진행 중"이라며 "쟁쟁한 세계 영상 제작·유통사들도 웹툰의 가능성을 읽고 러브콜을 보내오고 있다"고 했다.

[공대 졸업한 만화 덕후… 네이버웹툰 김준구 대표]

"똑같은 만화책 3권씩 사요… 한권은 읽고, 한권은 소장, 나머지 한권은 대여용이죠"

네이버 웹툰 김준구(42·사진) 대표는 '만화 덕후(한 분야에 깊이 빠진 사람을 지칭하는 속어)'다. 김 대표는 "집에 만화책이 1만권 넘게 있는데 8800권까지 세다가 포기했다"며 "같은 만화책을 3권씩 사서 하나는 소장용, 하나는 내가 읽고, 나머지 하나는 대여용으로 쓴다"고 했다. 서울대 공대를 졸업하고 네이버에 개발자로 입사했지만 결국 관심사를 따라 네이버 최초의 사내회사(CIC·Company In Company)인 웹툰·웹소설 부문 대표가 됐다. 2017년부터 자회사를 맡고 있다.

12일(현지 시각)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만난 김 대표는 "1년의 3분의 2 정도는 해외에 머무르는 힘든 일정이지만, 남들보다 웹툰 다음 회를 먼저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여전히 즐겁다"고 했다. 취미와 일이 일치하는 이른바 '덕업일치(덕후 생활과 일이 같음)'인 셈이다. 그는 "옛날에는 '엄마, 나 만화가 할래'라고 하면 대번에 혼났지만 이제는 '엄마, 나 웹툰 작가 할래'라고 하면 학원 보내주는 시대가 되지 않았느냐"며 "글로벌 플랫폼을 만들어 국내 웹툰 작가들이 세계시장에서 돈을 벌 수 있는 구조를 만든 것 역시 보람"이라고 했다.

김 대표의 목표는 회사를 '디지털 세계의 디즈니'로 만드는 것이다.

"전 세계적인 유통망과 탄탄한 콘텐츠 판권을 가진 디즈니처럼, 네이버도 웹툰 플랫폼과 창작 생태계를 가진 세계적 엔터테인먼트 기업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웹툰은 한 사람이 저렴한 비용으로 엄청난 상상력의 대서사시를 펼쳐낼 수 있는 잠재력 있는 콘텐츠예요. 이를 위해서는 인공지능(AI)을 활용해 그림을 그리고 색칠하는 기술 개발도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