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10일 충남 아산 삼성디스플레이 사업장에서 13조1000억원을 차세대 대형 디스플레이에 투자한다고 직접 발표했다. 9월 초부터 일부 대형 LCD(액정표시장치) 라인 철거작업이 본격화했던 점, 지난 8월 말 일본 수출규제에 따른 피해 현황·대책을 점검하는 자리에서 이 부회장이 "지금 LCD 사업이 어렵다고 해서 대형 디스플레이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했던 점 등에서 ‘시기·규모의 문제’이지 기정사실화됐던 투자였다.

관심은 ‘문재인 대통령의 입’에 더 쏠렸다. 문 대통령은 올해 상반기 삼성전자가 2030년까지 133조원을 투자해 ‘시스템(비메모리) 반도체 1위’에 오르겠다고 발표했을 때도 ‘1조원의 선물 보따리’를 풀어놓았었다. 한국 수출경제를 떠받들고 있는 메모리 반도체(D램·낸드플래시)가 업황 부진에 크게 흔들리자 시스템 반도체 육성은 불가피하며 국가 차원의 지원도 뒷받침돼야 한다는 판단에서였다.

이번 삼성디스플레이의 ‘대형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투자 선언’ 역시 마찬가지였다. 중국은 정부 지원에 힘입어 대규모로 LCD 공장에 투자해 생산 여력은 물론 시장점유율까지 한국을 제친 상황이다. 업계에서는 차세대 디스플레이로 꼽히는 OLED에서만큼은 시간을 벌어야 한다는 위기감이 퍼져있다. BOE·비전옥스 등 중국 디스플레이 업체들이 중소형 OLED 투자를 본격화한 데 이어 HKC는 우리돈으로 약 5조원을 투입해 2021년부터 TV용 OLED 패널 양산에 뛰어들겠다고 최근 발표하기도 했다. 삼성이 양산하겠다는 시기와 꼭 같다.

문 대통령은 이날 "삼성디스플레이는 산업을 OLED 중심으로 재편해 세계 시장에서 압도적 1위를 지키겠다는 각오로 과감한 투자를 결정했다"면서 세 가지 지원을 약속했다. △향후 7년간 4000억원의 대규모 예산을 차세대 디스플레이 기술개발에 투자할 것 △충남 천안에 신기술을 실증·평가하는 ‘디스플레이 혁신공정 테스트베드’를 구축해 소재·부품·장비 기업이 개발한 신기술이 빠르게 상품화되도록 할 것 △향후 4년간 2000명 규모의 차세대 디스플레이 연구인력·산업인력을 배출할 것이 핵심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0일 삼성디스플레이 사업장을 방문해 차세대 디스플레이 제품을 체험하고 있다. 오른쪽 뒤편으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도 서 있다.

정부의 시스템 반도체 투자 약속 때와는 사뭇 다른 반응이 업계에서 쏟아져 나왔다. 이미 충남도가 진행하고 있는 사업을 재탕·삼탕했다는 지적이다.

문 대통령이 이날 방문한 충남은 ‘우리나라 디스플레이 산업의 중심지’로 불리는 곳이다. 연간 58조원 규모의 한국 디스플레이 수출 가운데 절반 이상을 책임지는 삼성디스플레이 사업장·관련 협력사들이 몰려 있다. 충남도는 일찌감치 중국발 디스플레이 굴기에 대항하는 차원에서 ‘디스플레이 혁신공정 플랫폼’ 구축사업을 준비해 왔고, 지난해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최종 예비타당성 조사 관문을 통과, 올해부터 예산을 집행하고 있다. 사업은 2025년까지 약 5280억원을 투입해 △기술 개발을 위한 연구과제를 수행(3630억원)하고 △충남 천안시에 디스플레이 혁신공정센터를 설립(1650억원)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한 디스플레이 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혁신공정센터에 테스트베드를 구축하겠다는 것이고, 총 5280억원 예산 가운데 올해 집행된 예산을 제외하면 4000억원 전후가 될 것"이라며 "지난 7월 충남지사가 디스플레이 혁신공정 플랫폼으로 일본 수출규제를 돌파하겠다고 하더니 이번에는 같은 사업으로 대통령이 생색을 낸 것 아니냐"고 말했다.

미·중 무역전쟁, 일본 수출규제 같은 거대한 리스크 속에서도 ‘반도체 코리아’는 그래도 버틸 내공이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반면 디스플레이는 삼성이 투자를 결정한 지금이 차세대 디스플레이 시장에서도 세계 1위를 지켜낼 수 있는 골든타임이라고 말한다. 충남도의 디스플레이 혁신공정 플랫폼 사업 목표는 ‘2025년 시장점유율 70% 이상, (중국과의) 생산격차 5년·기술격차 3년 달성’이다. 정부가 삼성·LG의 투자만 환영하고, 줬던 선물을 다시 끄집어내는 것 가지고 만으로는 어려운 목표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