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재생사업을 추진 중인 서울시가 뉴욕에 세계 최초의 지하공원을 조성하는 프로젝트를 총괄하고 있는 해외 업체의 아이디어와 디자인을 도용했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도용 논란에 대해 서울시 측은 "논란이 있는 부분은 이해하고 해외 건축사무소가 섭섭한 부분은 있겠지만 도용은 없었다"고 밝혔다.

지난 2016년 9월 박원순(오른쪽) 서울시장이 미국 뉴욕 도시재생 현장인 ‘로우라인 랩’을 방문해 관계자들과 현장을 살펴보고 있다.

서울시와 도시재생 협업을 진행했던 제임스 램지 뉴욕 라드스튜디오(Raad Studio) 대표는 2009년 뉴욕에 방치된 지하공간을 공원으로 재생하는 사업인 ‘로우라인(Lowline)’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그는 로우라인이라는 별도 회사를 세웠고, 이들이 2015년부터 2017년까지 사업타당성을 얻기 위한 취지로 임시 개방한 로우라인 랩(연구소)에는 7만명의 방문객이 몰리기도 했다. 세계 첫 지하공원 사업으로 큰 조명을 받자 서울과 프랑스 파리 등 세계 여러 도시들이 이 프로젝트에 관심을 보였다.

2016년 8월, 서울시 도시공간개선단은 뉴욕 지하공간 재생사업 ‘로우라인 프로젝트’에 관심을 보이며 이 사업을 총괄하는 라드스튜디오(로우라인) 측에 접촉했다. 이후 그해 9월 5일 박원순 서울시장을 비롯한 서울시 관계자들이 뉴욕을 방문해 현장에서 ‘서울시에도 이런 아이디어를 사용하면 좋겠다’는 얘기가 오갔다.

이를 시작으로 서울 지하공간 재생사업 논의가 본격화됐다. 뉴욕 라드스튜디오 디자이너들은 작년 8월까지 종각역 등 서울 지하 유휴공간 재생에 관한 협업을 이어갔다. 라드스튜디오의 기술 협력업체도 연결해줬다. 하지만 서울시는 로우라인팀과의 일을 끊었고, 그해 12월 서울시는 서울 지하철 1호선 종각역에서 종로서적(종로타워 지하2층)으로 이어지는 지하 유휴공간을 태양광으로 식물을 키우는 지하정원으로 재생해, 2019년 10월 개방하겠다는 발표도 했다.

국내 언론 보도를 통해 이 소식을 접한 라드스튜디오 측은 "서울시에 제공해온 아이디어와 디자인을 서울시가 합당한 대가 없이 도용·침해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하지만 서울시는 "초기 사업 아이디어와 디자인 제공에 대한 대가를 지불했기에 도용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서울시가 아이디어·디자인 훔쳤다"
지난 달 미국 뉴욕에서 기자와 만난 제임스 램지 라드스튜디오·로우라인 대표 및 총괄디자이너는 "서울시가 아이디어를 훔쳤다"며 서울시에 대해 비난의 목소리를 냈다.

라드스튜디오에는 박기범, 한상윤 건축가 등 한국인들도 몸담고 있다. 라드스튜디오 관계자는 자료들을 보여주며 "초기에 우리가 제공한 디자인 앵글이 똑같고, 심지어 나무 몇 그루마저 그대로 따다 그렸다. 육각형의 천장 구조도 초기 안 중 하나"라고 말했다. 100% 똑같지는 않지만 디자인 곳곳에 흡사한 부분이 있었다.

사진 왼쪽은 서울시가 작년 12월 언론 보도자료를 배포해 공개한 종각역 지하정원 조감도. 오른쪽은 뉴욕 라드스튜디오(Raad Studio)가 서울시에 제공했던 초기 디자인 중 하나. 두 디자인 조감도의 상단부가 거의 닮았고, 지하층 부분의 이미지도 유사한 부분이 있다.

이와 함께 라드스튜디오 측은 "2015년 뉴욕에서 연 로우라인 랩(Lowline Lab)의 기본 개념까지 그대로 서울시의 콘셉트로 기사가 나갔는데, 우리가 뉴욕에서 연구소를 먼저 연 목적은 지하공원을 조성하려면 얼마나 많은 빛이 필요한지, 어떤 높이까지 도달해야 하는지, 어떤 식물이 어떤 환경에서 잘 자라는지 등에 대한 환경조사 성과를 보여주려는 것이었다"며 "우리의 아이디어와 돈, 시간, 기술, 노력을 쏟은 성과물"이라고 말했다.

◇서울시 "조감도 출처 도용 아닌 서울시 것"
서울시는 사업 아이디어와 조감도에 도용이 결코 없었다는 입장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제임스 램지 디자이너가 공식적으로 기본구상에 참여했고 그의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기본계획을 수립한 것으로, 서울시는 기본구상에 대한 보수를 줬기 때문에 도용이라는 말은 잘못됐다"고 주장했다.

뉴욕 업체와의 협업을 중단한 이유에 대해 서울시 측은 "설계 도면을 그리는 후속 작업은 한국 건축사무소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라고 했다. 초기엔 뉴욕 측 디자이너에 프로젝트 선행 작업을 의존해 왔으나, 전기설비나 설계 등 후속 작업은 국내 업체에 맡기면 된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앞서 지난해 배포된 서울시 보도자료와 홈페이지 등에 있는 유휴 지하공간 재생 사업에 관한 조감도 디자인 출처에 대해서도 사업 주무부서인 서울시 안전총괄과 담당자는 "서울시다. (기사에도) 서울시로 하면 된다"고 답했다.

◇보상 놓고도 양측 입장 차 커
합당 보수를 두고도 양측 의견이 크게 엇갈린다.

서울시와 라드스튜디오가 각각 제시한 편성 사업비와 지급액수도 큰 차이가 있다. 작년 12월 서울시는 종각 유휴 지하공간 재생 프로젝트 사업비를 39억4500만원으로 책정했다고 밝혔다.

라드스튜디오에 따르면 이 회사는 서울시 추천으로 2017년 9월 도시 건축비엔날레에 참여하기로 했다. 서울 지하 유휴공간 재생사업 추진에 앞서 기술이 효과적인지를 보여주는 쇼케이스 성격의 취지였다.

당시 라드스튜디오는 KBS아트비전으로부터 인건비와 작품제작비, 운영비, 설치비 등 총 1689만원을 받았다. 이와 함께 종각을 포함한 지하 유휴공간 3개 프로젝트에 대한 선정 금액이 약 4753만원인데 라드스튜디오와 기술협력업체 선포탈이 60%를 받고, 나머지 40%는 한국 건축사무소가 성과물 납품 및 제작금액을 명목으로 가져갔다.

서울시는 "뉴욕 디자이너 구상안에 대한 보상을 지불했기 때문에 도용이 아니다"라고 거듭 강조했다.

반면 라드스튜디오 측은 "종각 등의 프로젝트와 관련 해 서울시로부터 받은 금액 전부를 서울 비엔날레 시공업체에 지불했다"며 "1년 이상 서울시와 지하 유휴공간 관련 업무를 진행하면서 우리의 이윤은 단 한 푼도 없었으며, 오히려 우리 회사 돈을 투자해 일을 진행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본격적인 디자인이 시작되면 서울시가 새롭게 계약을 진행할거라 믿었기 때문에 금액에 대해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있었던 것"이라며 "결국 우리에게 돌아온 것은 없다"고 말했다.

라드스튜디오가 서울시에 제공했던 초기 디자인 중 하나.

◇협업 중단 이유 놓고도 말 달라
서울시와 뉴욕업체의 협업이 중단된 배경을 놓고도 양측은 시각 차이를 보였다.

서울시 관계자는 "뉴욕 업체가 종각을 비롯해 다른 공간 사업까지 단독으로 진행하고 싶었던 것 같다"며 "하지만 국내 계약법상 정부 및 지자체 사업을 해외 업체가 단독으로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뉴욕 업체는 반박했다. 법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이를 반영해 일을 진행해왔다는 설명이다. 라드스튜디오 관계자는 "2017년 6월 서울시로부터 지하 유휴 공간 3곳(신설동 유령역, 경희궁 지하벙커, 종각 지하계단 광장)에 관한 자료를 받아 본격적으로 3개 프로젝트 디자인을 시작했는데, 그때 한국 법규상 로컬(현지) 건축가가 필요하다고 해 서울시가 추천한 A건축사무소가 업무 진행을 도와주게 됐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라드스튜디오와 기존 기술협력업체인 선포탈, 한국의 A건축사무소가 같이 일을 하게 됐고, A업체는 관공서 관련 문서 및 법규등을 확인·정보를 제공해주는 역할을 하는 수준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이미 해외 건축가를 통해 디자인된 것을 보고 협업을 요청한 뒤 이후 어떻게 현지(한국) 업체가 독단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 된다는 생각을 했는지 이해가 안 간다"며 "서울시가 이를 의도한 것인지, 방관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고 비판했다.

◇서울시 안일한 태도 문제없나
그동안 뉴욕 라드스튜디오 측은 소송 제기를 검토하며 서울시와 국내 업체 동향 등을 살펴왔다. 라드스튜디오 측은 "지난해 소송 제기를 고려했다"며 "다만 서울시가 올해 종각역 지하공간 재생 프로젝트(태양광 정원)를 개장하면 이 디자인과 아이디어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지를 지켜보려 했다"고 말했다.

서울시가 지적재산권 이슈에 둔감하다는 논란의 여지도 있다. 취재 과정에서 서울시 관계자는 기자에게 "이런 상황을 알려줘 고맙다"면서 "제임스 램지 디자이너가 섭섭한 부분이 있을텐데, 그를 연말 종각 태양광 정원 개장식에 초청해 보겠다"고 했다. 그는 "미국과 한국의 문화∙제도적 차이(에 따른 오해) 같다"는 말도 했다.

서울시와 협업 경험이 있는 한 업체 대표(익명 요구)는 "서울시와 논의 과정에 드는 시간과 비용에 비해 업체가 제대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열정페이처럼 되는 일이 분명 있다"며 "한국 업체는 ‘을’로서 어쩔 수 없이 감내하지만 해외 업체는 이를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서울시는 지난 9월 말 종각역 지하정원의 명칭 공모에서 ‘종각역 태양의 정원’을 결정했으며 오는 11월 개장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