伊 캄필리오네 = 류정 기자

지난달 23일(현지 시각) 이탈리아 북부 밀라노에서 차로 2시간 반 정도 떨어진 알프스 산맥 끝자락. 이곳엔 자동차 산업 위기에도 끄떡없는 부품 공장이 있다. 한온시스템이 지난 4월 인수한 마그나 유압제어 부문 소속이었던 캄필리오네 공장. 현장에서 만난 다비데 아타르디 공장장은 "요즘 주문이 밀려 주 6일 일한다"며, "직원들 일요 근무를 최대한 줄이는 게 고민"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직원 600여 명인 이 공장의 주력 품목은 전동 쿨링팬과 전동 워터펌프. 내연기관차 연비를 높일 뿐 아니라, 친환경차(전기차·수소차·하이브리드차)의 주행거리를 늘려주는 '열관리 시스템'의 핵심 부품이다. BMW, FCA 등 기존 고객사들의 주문이 쇄도하는 데다 최근엔 현대차가 신차 프로젝트까지 맡겼다. 이 때문에 캄필리오네 공장의 빈 부지에서는 증설 공사가 한창이다. 아타르디 공장장은 "내년엔 생산량을 현재의 1.5배로 확대하고, 고용도 더 늘릴 예정"이라며 "지역 경제에도 활기가 돌고 있다"고 말했다.

0.5차 협력사로 떠오른 한국 부품사

'티어(Tier) 0.5'

요즘 자동차업계에선 1차 부품사(티어원·Tier1) 중 미래차 핵심 기술을 확보해 위상이 높아진 기업들을 이렇게 부른다. 업계에선 국내 최대 부품사(현대차 계열 제외)인 한온시스템이 이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비결은 기술력이다. 한온시스템은 전기차·하이브리드차 등 친환경차에서 발생하는 열을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기술을 확보하고 있다.

지난달 23일(현지 시각) 한온시스템이 최근 인수한 이탈리아 캄필리오네 공장에서 만난 다비데 아타르디 공장장은 "친환경차 핵심 부품을 만드는 우리 공장은 3교대로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다"며 "일이 너무 많아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열관리 시스템'은 친환경차의 주행거리를 결정하는 핵심 기술로 떠오르고 있다. 전기동력을 쓰는 친환경차는 기존 내연기관차보다 배터리·연료전지 등에서 열이 더 많이 발생한다. 이를 식혀주지 않으면 주행 성능이 떨어지고 화재 위험이 생긴다. 또 냉난방, 특히 난방에 전기가 많이 들어 1회 완전 충전했을 때 달릴 수 있는 거리에 손실이 발생한다. 최소한의 에너지로 차량 열을 식혀주고, 냉난방을 하는 기술이 중요해지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기존 내연기관차의 열관리 부품 매출이 차 한 대당 500달러 정도라면, 하이브리드는 1200달러, 전기차는 2000달러, 수소차는 3000달러로 커진다"고 말했다. 전기차로 가면 부품 수가 내연기관차의 절반 이하로 줄어들지만, 열관리 시스템 비중은 2~6배로 커지는 것이다.

한온시스템은 열관리 시스템 분야 점유율이 일본 유력 부품회사인 덴소에 이어 2위다. 하지만 덴소가 모회사인 도요타를 비롯한 일본차 업체에 공급하는 매출이 대부분인 것에 비해, 한온시스템은 글로벌 완성차업체 대다수를 고객사로 두고 있어 성장성이 더 높다고 평가받는다. 한온시스템은 최근 폴크스바겐의 전기차 전용 플랫폼 MEB를 공동개발하는 12개 핵심 부품사 중 하나로 선정됐다. 이 외에도 독일·미국·중국 등 글로벌 차 업체의 발주가 늘어 연평균 10~20% 성장이 예상되고 있다. 2023년 예상 매출은 지난해 대비 60% 증가한 10조원, 상각전 영업이익(EBITDA)은 85% 증가한 1조3000억원이다.

비결은 '핀셋 M&A'와 '뚝심 연구개발'

한온시스템의 도약은 뚝심 있는 R&D 투자로 확보한 기술력에다, 꼭 필요한 기술을 콕 집어 인수하는 '핀셋 M&A(인수·합병)'로 경쟁력을 극대화한 덕분이다. 최근 5년간 R&D 투자 1조3500억원에다, M&A(지분 투자 포함) 7건에 1조5000억원을 쏟아부었다.

1986년 만도기계·포드가 합작한 '한라공조'가 전신인 이 회사는 탄생부터 M&A 유전자를 갖고 있다. 2014년엔 쿠퍼스탠더드오토모티브사의 열관리·배기 사업부를 550억원에 인수, 전기차에서 수요가 급증하는 밸브의 경쟁력을 확보했다. 또, 2016~2018년 500억원 이상을 들여 중국 국영기업들과 합작사를 4개 추가 설립, 중국 현지 완성차 법인 판로를 위한 합작사를 11개로 확대했다. 2018년엔 미국 전고체 배터리(전해질이 고체인 차세대 배터리)개발업체 솔리드파워에도 투자를 단행했다.

가장 결정적인 M&A는 올해 4월 1조4000억원이라는 초대형 베팅으로 손에 넣은 마그나 유압제어 부문이다. 세계 3대 부품사인 마그나로서는 비주력 사업이었지만, 한온시스템에는 꼭 필요했다. 예를 들어 한온은 '쿨링팬'은 생산하고 있었지만, 팬 중앙에 들어가는 '전동모터'는 마그나가 생산했다. 한온은 두 개를 모두 합친 '전동 쿨링팬'을 납품할 수 있게 되면서 경쟁력이 증폭됐다. 마그나 인수(공장 9개·연구센터 5곳·직원 4100명)를 통해 한온시스템은 전 세계 51개 공장, 23개 연구센터, 직원 2만2000여 명을 확보했다. 자체 R&D는 성장의 밑거름이 됐다.

특히 매출에서 최대 비중을 차지하는 전동 컴프레서는 자체 개발한 것이다. 한온시스템은 지난 10여 년간 매출의 4% 수준을 R&D에 투자해왔고, 올해는 5% 수준으로 올렸다. 권준범 한온시스템 유럽 주재 팀장은 "자체 축적된 기술과 M&A로 얻은 기술이 만나 '최고의 제품'이라는 퍼즐이 맞춰졌다"고 말했다.


[한온시스템 대표 성민석] 매물로도 안나온 기업, 콕 찍어서 인수 성공

"부품사 위기 속에서 성장할 수 있던 비결은 '고객 다변화'다."

성민석(49·사진) 한온시스템 대표는 지난달 본지 인터뷰에서 "과거 부품 산업은 완성차의 우산 아래에서 평준화돼 있었지만, 지금은 그 우산에서 벗어나야 생존할 수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한온시스템은 현대차·포드 매출 비중이 2년 전 74%였지만, 최근 마그나 사업부를 인수하면서 60%로 낮아졌다. GM·폴크스바겐·FCA·다임러 등 다양한 글로벌 고객이 추가 발주한 물량이 더해지면서 2023년엔 50% 이하로 낮아질 전망이다. 그는 "경쟁사와 달리 고객 다변화에 성공한 것이 향후 20년간 핵심 경쟁력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1994년 포드 공조 개발 엔지니어로 출발해 2016년 한온시스템 전무, 2017년 부사장에 오른 그는 2년 만인 올 초 고속 승진해 최고운영책임자(COO)에 올랐다. 그는 전 세계 오지에 흩어져 있는 51개 공장을 한 해 최소 한 번 이상 들르는 '지구 5바퀴 행군'을 마다하지 않는다. 마그나 유압제어 사업 인수를 성사시키는 데에도 핵심 역할을 했다. 그는 M&A 시장에 매물로 나오지도 않은 사업부를 마그나에 팔라고 먼저 제안했다. 성 대표는 "마그나 입장에선 주력사업(파워트레인)에 선택과 집중을 할 필요가 있었다"며 "우리로선 꼭 필요한 사업이라 서로 '윈윈'이라는 점을 설득했다"고 말했다.

그의 경영철학은 "직원들에게 오너십을 주라"다. 인수한 마그나 사업부에도 경영 간섭을 최소화해 임직원 3명을 보낸 것이 전부였다. 본지가 방문한 이탈리아 공장도 100% 현지 직원이 일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