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 소송전’이 국내 형사 소송으로 번지면서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인력유출 여부를 놓고 시작된 갈등이 특허분쟁에 이어 최근 형사 문제로 심화되는 양상이다. 정부가 중재에 나섰지만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지난 20일 서울지방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는 SK이노베이션(096770)본사 등을 압수수색했다. 지난 17일에 이어 2번째 압수수색이다. LG화학(051910)이 지난 5월 ‘산업기술유출 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 등의 혐의로 SK이노베이션 직원 등을 서울지방경찰청에 고소한 데 따른 조치다. 경찰은 "1차 압수수색에서 확보한 자료 외 추가 자료를 확보할 필요성이 생겨 압수수색을 진행했다"고 밝혔다.

앞서 양사의 최고경영자(CEO)는 16일 분쟁 해결을 위해 회동했지만, 서로의 입장차만 확인하고 발길을 돌렸다. 이번 압수수색으로 합의는 사실상 물 건너간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장기전으로 접어든 분쟁의 전말을 되짚어봤다.

(왼쪽부터) 최태원 SK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LG화학 "SK가 2년간 인력 100명 빼가 영업비밀 유출"

이번 갈등의 핵심 쟁점은 인재 유출에 따른 2차전지 기술 유출 여부다. LG화학은 "SK가 2년간 100명에 가까운 인력을 빼가는 과정에서 핵심 기술과 영업비밀이 다량 유출됐다"고 주장한다. 이에 LG화학은 지난 4월 LG화학이 미 무역위원회(ITC)와 델라웨어주 지방법원에 SK이노베이션을 영업비밀 침해로 제소했다.

LG화학은 수년간 전지 사업에 사활을 걸어온 만큼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LG화학은 전체 매출의 약 60%를 차지하는 석유화학 사업 의존도를 낮추고, 2024년까지 전기차 배터리를 포함한 전지 사업을 전체 매출의 50% 수준인 31조원까지 끌어올린다는 계획이다.

LG화학은 전지사업 부문 연구개발(R&D)과 인력에 투자를 확대하는 등 전사적인 역량을 집중해왔다는 점을 강조한다. LG화학 전지사업 부문 임직원 수는 6월 말 기준 약 5933명으로 7년 사이 80% 늘었다. SK이노베이션의 경우 관련 임직원 수가 1000여명에 불과하다.

LG화학 오창공장에서 직원들이 전기차 배터리를 점검하고 있다.

LG화학이 보유한 2차전지 관련 특허건수는 1만6658개로, SK이노베이션(1135건)의 14배에 달한다. 지난해 R&D 투자금액도 지난해 기준 LG화학이 1조원, SK이노베이션은 2300억원으로 4배 정도 차이가 난다. LG화학 측은 "전지분야 R&D 투자액만 3000억원이 넘는다"고 했다. 특허와 R&D 투자 경쟁력을 자신하는 만큼 형사 소송까지 동원해 SK이노베이션을 압박하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LG화학은 "SK이노베이션은 조직적·계획적으로 채용 과정에서 LG화학의 2차전지 관련 핵심기술과 영업비밀을 빼갔고, 이를 활용해 2차전지 개발 및 수주에 활용했다"면서 "이번 경찰 수사를 통해 경쟁사의 불공정행위가 밝혀지고, 선의의 경쟁을 통해 국가 배터리 산업 경쟁력이 더욱 강화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SK "LG화학 출신 자발적 지원자 많아…특허는 양보다 질"

SK이노베이션은 LG화학의 소송에 맞서 지난 6월 서울중앙지법에 명예훼손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고, 이달 초엔 미국 ITC와 연방법원에 특허 침해 혐의로 LG화학을 맞제소했다.

SK이노베이션은 "LG화학 출신 인력 채용은 유감이나 워낙 지원자가 많았고 100% 공개채용 방식으로 진행됐다"면서 SK이노베이션이 LG화학의 인력을 부당하게 채용했다는 주장에 반박했다. 기술 유출과 관련해서는 "최첨단 배터리 소재인 NCM811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고 양산하는 등 SK이노베이션의 기술력이 우수함을 증명하는 객관적 자료나 근거는 차고 넘친다"고 주장했다.

지난 6월 LG화학을 상대로 국내 법원에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는 SK이노베이션이 1990년대부터 배터리 연구개발을 시작했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이어 "‘묻지마식 소송’에 대응하느라 사업 수주, 시장 대응 등 기회손실이 막심할 뿐 아니라 인적·경제적으로 고통이 매우 크다"면서 "배터리 산업은 소송보다는 협력해야 할 때"라고 했다.

(왼쪽부터) 신학철 LG화학 부회장과 김준 SK이노베이션 사장.

◇재계 "LG·SK 총수 만나서 갈등 풀어야"

양사가 분쟁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면서 소송전은 장기화될 전망이다. 두 회사 모두 전기차 배터리를 신사업으로 키우고 있어서 어느 한쪽도 먼저 물러서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ICT 최종판결은 내년 말로 예정돼 있으나, 업계와 정부는 다툼이 끝까지 가는 상황은 오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분쟁이 끝까지 갈 경우, 패하는 쪽은 막대한 피해를 볼 가능성이 크다.

업계에서는 LG그룹과 SK그룹의 총수가 만나 담판을 짓기 전까지는 양사가 합의점을 찾기 어려울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재계 관계자는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구광모 LG그룹 회장이 직접 만나서 해결해야 하는 문제지만, 현재로서는 두 총수가 개입할 가능성은 작아 보인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