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에서 전통적으로 호텔은 여관(旅館)이었다. 여기서 한문의 '려(旅)'라는 글자는 '500명의 군사'가 본뜻으로 하나의 깃발 아래 모인 여러 병사들의 모습을 그린 것이라 한다.

이 병사들 가운데 고향을 떠나 멀리 온 사람들이 많았기에 여행, 여객, 여관이란 말도 생겨났을 것이란 추론이다.

일모도원(日暮途遠), 날은 저물었는데 가야 할 길이 멀면 천막을 쳐야 한다. 전통적으로 잠자리의 제일 중요한 요소는 안전이다. 이동을 하는 삶을 사는 유목민이나 집시 족조차도 약탈당하지 않을 곳, 자연재해로부터 위험이 적은 곳에 야영 텐트를 쳤다.

숙소에서 바라본 마닐라 시내와 바닷가. 최신식 호텔에서부터 공유숙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숙소가 발달되어 있다.

호텔은 디지털 시대의 천막이다. 출장이 잦은 현대의 디지털 유목민들은 숙소를 고를 때 취향이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모든 게 순조롭고 계획대로 진행되길 원하기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브랜드의 호텔 방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그 한 부류다.

대부분의 출장자들도 여기에 속한다. 이곳에 있다 보면 비교적 안전하고 예측 가능한 대신 그 도시의 진면목을 알기 어렵다. 관광객들만 붐비는 곳에서는 화장을 걷어낸 진짜 얼굴을 만나기 쉽지 않다는 단점이 있다.

반면 상대적으로 모험적인 취향의 사람들은 현지인들의 삶 속에 들어가 숙소를 잡는다. 후자의 취향을 파고들어 성공한 사업모델이 ‘에어비앤비’다. 현지의 주택이나 아파트를 여행자와 연결시켜주는 공유숙박 플랫폼이다.

CEO 자리에서 벗어난 이후 나는 해외 여행이나 출장 때마다 공유숙박을 자주 이용하는 편이다. 가끔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마닐라 베이에서 바라본 마닐라 시내 전경.

"그냥 돈 좀 더 내고 좋은 호텔에서 주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과거의 타이틀도 있고, 안전도 생각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고마운 의견이지만, 공유숙박을 원하는 사람들의 취향을 전혀 모르는 소리다. 그것은 단지 비용문제만은 아니다. 체류하는 동안 그 도시 사람들이 무엇을 먹고 마시며, 어떤 옷을 입고 장식은 어떻게 하는지 일상의 삶을 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보길 원하는 까닭이다.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관심이랄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세상사람들과 진정으로 소통하길 바라는 목적이다. 모종린 연세대 국제대학원 교수가 ‘골목길 경제학’에서 강조한 골목길 게스트하우스의 미학은 비슷한 맥락이다.

"(골목 게스트하우스) 주인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눈으로만 훑었을 때는 결코 알지 못할 골목의 진짜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 그곳의 주인장만큼 골목을 이해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골목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 작고 구석진 골목에 게스트하우스를 열지 않았을 것이다. 골목에 대한 애정이 깊은 주인장이 주변 가게와 특별한 장소를 추천해주고 골목의 역사를 이야기해준다면 그것만큼 훌륭한 가이드가 어디 있겠는가."

포르투갈 포르투의 에어비앤비 숙소는 넓은 침실에 개별 욕실이 갖춰져 있으며 독서하기에 좋은 채광의 베란다까지 구비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격은 저렴하여 장기체류자에게 인기 높은 숙소다.

현지인들이 사는 골목에 게스트하우스를 정하거나 숙박공유 서비스를 통해 현지인의 집을 숙소로 구하면 장점이 많다.

가장 큰 장점은 잠시 스쳐가는 관광객들이 아닌 이 도시를 기반으로 살고 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포르투갈 제2의 도시이자 와인항구로 소문난 포르투에서 행복한 경험은 현지인의 집이 아니었다면 애당초 불가능했다.

저녁식사 시간 때가 되면 그곳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만들고 함께 그릇을 씻으며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함께 시장도 보고 그들이 선호하는 작지만 의미 있는 동네 카페도 갔다.

우리가 나눈 것은 음식과 음료만이 아니었다. 맥주 잔을 앞에 두고 꿈과 열정, 그리고 아픔까지 함께 나눌 수 있었다. 집을 떠나왔지만 또 다른 집에서 따스함이 기다리고 있었다. 진정한 공유숙박 정신이란 그런 것이며 숙소는 오아시스였다.

거실과 주방을 겸한 포르투 에어비앤비 1층. 저녁이 되면 계단 위에서 집주인과 투숙객들이 내려와 함께 요리를 하고 음식과 마실 것을 나눈다. 진정한 ‘공유주방’의 정신이 살아있는 곳이다.

포르투에 앞서 베를린 예술가의 집에서, 피렌체 공방 운영하는 집주인에게서도 나는 비슷한 체험을 하였다. 그러한 연유로 최근 마닐라에 짧은 출장을 앞두고 나는 다시 한번 현지의 숙소를 예약하기 위해 숙박공유사이트를 검색하였다.

"에어비앤비와 함께 잊지 못할 여행이 시작됩니다."

예약을 위해 접속한 사이트에서 그렇게 속삭였다. 뭔가 동화 같은 일들이 생길 거라는 기대를 부추긴다.

공항에서 ‘그랩’이라 부르는 공유자동차 서비스를 이용해 마카티 지역의 숙소에 도착했다. 마카티는 서울의 강남 같은 곳으로 비즈니스 지역이며 공유경제가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미니정보] 마닐라의 교통과 그랩(Grab)]

숙소의 로케이션은 환상적이었다. 광고의 사진처럼 침실과 거실, 주방까지 갖춰진 멋진 콘도였다. 게다가 개인적으로 무척 선호하는 야외 베란다가 있어 마닐라 베이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소리까지 들을 수 있으니 금상첨화 아닌가?

마닐라 에어비앤비의 숙소. 침실과 거실이 분리되어 있고, 주방시설도 갖춰져 있었다.

하지만 또 다른 의미로 ‘평생 잊지 못할 여행이 시작’될 줄은 몰랐다. 전혀 예상치 못한 리스크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첫날 일정을 끝내고 피곤에 젖어 잠자리에 드는 순간 침대가 기우뚱거리더니 낮은 곳으로 푹 꺼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어서 조금 뒤 뭔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까지 들린다. "헉, 지진이 일어난 것일까?"

놀라서 일어나 놀라서 일어나 전등을 켜고 침대를 살펴보니 애당초 부실한 침대의 구조물이 부서져버린 것이다. 간신히 수습하고 손을 씻기 위해 화장실로 들어갔더니 욕조 어디선가는 물이 새서 바닥이 물에 흥건히 젖어있다. 자칫하다가는 침실까지 흘러 들어올 아찔한 순간이다.

수건으로 급히 막고 나니 내가 얼굴 닦을 수건조차 없다. 대개의 에어비앤비는 수건 주는데 인색한데, 이 숙소의 경우 임대기간 동안 준 달랑 두 장의 수건이 전부였다.

허술한 침대 구조물. 겉보기와 달리 싼 가구와 시설로 인한 종종 분쟁이 많은 공유숙박이다.

급히 주인에게 연락하니 회신이 없다. 다음날 고양이 세수만 간신히 하고 다른 곳에 가서 샤워할 수 있었다. 사흘째 되던 날 집주인과 간신히 연락이 닿을 수 있었고, 그제서야 사태의 심각성 파악하고 수리담당 직원을 보냈다. 물론 나의 일정은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뒤였다.

이런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 에어비앤비의 사용자 리뷰를 살펴보고 평가가 좋은 곳이나 ‘슈퍼 호스트’로 선정된 집주인의 장소를 선택하라고 하지만 결과는 엉망이었다.

현지 주민들의 삶을 함께 공유한다는 원래의 취지와 달리 상업용으로만 임대하는 업자들도 꽤 많은 게 현실이어서 도시마다 임대 분쟁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기도 하다.

이런 악몽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올해 초 파리의 에어비앤비로 예약을 하고 유서 깊은 생제르망데프레 거리에 있는 숙소로 달려갔더니 다른 곳으로 오라는 집주인의 일방적인 문자 통보를 받았다.

게다가 1박 뒤 다른 숙소로 또 옮겨야 한다는 것이다. 항의를 했더니 어쩔 수 없으니 선택하든지 포기하든지 맘대로 하라며 최후 통첩을 하는 게 아닌가. 큰 가방을 들고 파리의 길거리에 내동댕이쳐진 기분은 참담하였다.

울며 겨자 먹기로 그 제안에 따를 수밖에 없었지만 또 다시 옮긴 숙소에서는 제대로 발을 뻗기조차 힘든 협소하기 짝이 없는, 도저히 집이라 부를 수 없는 그런 곳이었다. 아무리 숙소가 비싼 파리라고는 하지만 그런 곳을 1박에 100달러 이상 요구하는 프랑스 백인여자의 행태는 분노를 야기하였다.

파리 생제르망데프레 거리의 에어비앤비 숙소. 침대는 발을 뻗을 수 없을 정도이고, 허접한 주방기구마저 베개 머리맡 위에 놓여있었다.

결국 에어비앤비 본사에 중재를 요청하는 수밖에 없었다. 양측의 주장이 팽팽히 맞설 때는 객관적인 근거 자료가 필수다. 사진이나 동영상, 서류 같은 것을 말한다. 근거 자료가 없으면 오히려 이쪽이 다 뒤집어 쓴다.

결국 파리의 경우는 이용자인 나의 손을 들어줘 보상받을 수 있었다. 그때의 경험으로 마닐라의 숙소분쟁은 집주인이 과실을 인정하고 임대비용 전액을 환불하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엉망이 된 일정이나 잡쳐버린 기분을 되찾을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런 경험도 여행의 어쩔 수 없는 일부다. 삶의 그러하듯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