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소비자물가가 사상 처음으로 마이너스를 기록하며 가뜩이나 어려운 한국 경제에 디플레이션 공포를 드리우고 있다. 경기 침체 속에 물가도 떨어지는 디플레이션은 IMF 외환 위기나 글로벌 금융 위기 같은 경제 위기 때도 경험해보지 못한 영역이다. 경제학자들은 일본 등 선진국 사례를 볼 때 디플레이션이 인플레이션보다 더 길고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말한다. 장차 가격이 더 내려갈 것이라는 생각에 소비자는 지갑을 닫고, 기업은 투자를 줄이며, 대부분 자산 가격이 하락하고, 대출자의 빚 부담은 늘기 때문이다.

◇온라인 쇼핑몰마저 주춤

지난달 초 한 인터넷 쇼핑몰은 일주일 동안 한시적으로 1만원 이상 주문 고객에게 횟수 제한 없이 무료 배송 서비스를 제공했다. 기존 4만원이던 무료 배송의 최저 주문액을 대폭 낮춘 것이다. 배달 인건비를 감안하면 손해다. 이런 파격적인 배송 서비스를 선보인 것은 경쟁 업체와의 경쟁을 의식해서만은 아니다. 최근 1인당 평균 구매 금액이 하락하면서, 무료 배송 최저액인 4만원을 채우지 못한 고객들이 일부 이탈 조짐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 회사 관계자는 "예전엔 주문 상품이 3만원어치면, 당장 필요하지 않아도 1만원어치를 더 구매해서 무료 배송을 받았다"며 "하지만 최근엔 돈을 아끼기 위해 주문을 포기하거나 3000원 배송비를 부담하고 꼭 필요한 것만 산다"고 말했다. 이 회사의 지난 7월 1인당 평균 주문액은 약 6만원으로 올해 1월 7만원대 중반과 비교하면 10% 이상 하락했다.

소비 심리가 위축되면서 그동안 유통 시장을 이끌어 왔던 온라인 시장의 상승세마저 꺾일 조짐을 보이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가 최근 발표한 '유통업체 매출 동향' 자료를 보면, 지난 7월 온라인 유통의 성장률은 8.7%를 기록했다. 이는 작년 9월 8.6% 성장률 이후 가장 낮은 것으로, 올해 상반기 평균 15% 성장률과 비교하면 거의 반 토막 수준이다.

오프라인 유통 상황은 더 심각하다. 사실상 마진을 포기하고 초저가 행사를 하고 있지만, 고객들이 선뜻 지갑을 열지 않는다. 서울 지역의 A 대형 마트는 지난달 29일부터 일주일간 고구마 1봉지를 중량 관계없이 5000원에 판매하고 있다. 예년 같으면 이런 상품은 통상 행사 기간 중에 모두 팔리지만 이번엔 일주일이 다 되어서도 안 팔렸다. 최근 일본 제품 불매운동도 소비시장엔 악재다. 산업부는 "일본 제품 불매운동 영향으로 의류 부문 매출이 큰 폭으로 줄면서 지난 7월 백화점 전체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4% 감소했다"고 분석했다.

◇전문가 "저성장·저물가 만성화 가능성"

사상 첫 마이너스 물가에 한국은행은 "농·축·수산물 및 석유류 등 공급 측 기저효과 때문이며, 연말에는 이러한 효과가 사라지면서 물가가 빠르게 반등하고 내년 이후에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1%대 수준으로 높아질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전문가들 중에는 한국 경제가 이미 디플레이션의 초입에 다다랐다고 보는 사람이 적지 않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실장은 "금리를 낮췄는데도 소비와 투자가 반응을 안 한다는 건 디플레이션에 빠질 가능성이 적지 않다는 의미"라며 "일단 디플레이션에 진입하면 물가와 실물경제가 동반 추락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고 말했다. 홍성국 혜안리서치 대표는 "독일과 스위스, 스웨덴, 대만 등 여러 나라가 이미 글로벌 디플레이션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며 "특히 우리나라는 저출산 고령화까지 맞물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처럼 디플레이션을 동반한 장기 불황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실제로 물가 하락과 함께 경제 활력이 떨어지는 징후도 뚜렷해지고 있다. 3일 한국은행은 2분기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1%(전 분기 대비)로, 당초 발표했던 속보치보다 0.1%포인트 깎였다고 발표했다. 한국은행의 성장률 전망치인 2.2%를 달성하려면 3분기와 4분기에 0.9~1%씩 성장해야 하는데, 수출, 생산, 소비, 투자 등 여러 경제지표들을 보면 달성이 거의 불가능하다.

정부는 일단 재정을 최대한 투입해 물가를 끌어올리고 경제의 불씨를 살리겠다는 입장이다. 김용범 기획재정부 제1차관은 "수요 측 요인, 즉 경제 활력이 다소 낮아지고, 한국 경제의 하방 압력이 커진 것은 맞는다"면서 "재정 지출 확대 등 확장적 거시정책을 지속하고 하반기 경기 보강 대책을 조속히 마련해 시행하겠다"고 했다. 정부는 4일 경제활력대책회의를 열어 내년도 공공기관 투자를 4분기로 앞당겨 집행하는 방안 등을 발표할 예정이다.

☞디플레이션

상품과 서비스의 가격이 공급 증가 또는 수요 감소로 인해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현상을 말한다. 이 경우 물가 하락은 소비와 투자 감소로 이어져 경기가 침체에 빠지고, 부동산과 주식 등 자산 가치도 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