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트뱅크 손정의 회장의 비전펀드(vision fund)는 운용 자산이 1000억달러(약 121조5600억원)가 넘는 세계 최대의 벤처투자펀드다. 글로벌 1등을 할 만한 기업에 수억달러 이상의 대규모 투자를 단행하는 비전펀드가 사단본부라면, 전초부대는 한국의 소프트뱅크벤처스다. 소프트뱅크벤처스의 역할은 될성부른 스타트업(초기 벤처기업) 발굴과 육성이다. 2000년 창업한 이후 동영상 채팅 서비스 '아자르'의 하이퍼커넥트, 축구 데이터 분석 기술 기업 비프로컴퍼니, 네이버의 사진 앱 스노우 중국 법인, 동남아 최대 전자상거래 기업 토코피디아 등 250여 기업에 투자했다.

최근 서울 서초구 본사에서 만난 이준표(38·사진) 소프트뱅크벤처스 대표는 "우리가 찾는 기업은 두 종류"라고 했다. 인공지능(AI) 같은 첨단 기술로 세상을 완전히 뒤바꾸는 기업, 그리고 단순한 서비스라도 삶을 편리하게 만들어주는 기업이다. 그는 "기술이든 서비스든 지향점은 시장의 수요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라며 "아무리 혁신적인 기술, 서비스라도 고객이 안 찾으면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손정의펀드의 전초기지

이 대표는 소프트뱅크벤처스 '장학생' 출신이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재학 중이던 2003년 '에빅사'라는 소프트웨어 업체를 창업했을 때 첫 투자자가 소프트뱅크벤처스였다. 이후 동영상 기술 기업인 엔써즈를 설립하고 KT에 매각한 그는 2015년 소프트뱅크벤처스로 합류, 작년 대표이사 자리에 올랐다.

그는 "최근 투자한 세탁 서비스 업체 런드리고가 바로 우리가 원하는 곳"이라고 말했다. 런드리고는 밤에 세탁물을 넣은 통을 문 앞에 두면 24시간 안에 세탁·건조·다림질까지 마무리해 갖다주는 서비스다. 동네 세탁소에 맡기면 2∼3일 이상 걸리는 드라이클리닝 같은 고급 세탁도 하루면 된다. "런드리고의 세탁 공장에 가보니 공정 대부분이 무인 로봇, 세탁물 분류 소프트웨어로 자동화됐습니다. 자동화와 배달 서비스를 통해 대표 가사노동인 세탁에서 사람들을 해방시켜줄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AI, 로보틱스 등 첨단 기술도 핵심 투자 영역이다. 지난 7월 소프트뱅크벤처스는 3200억원 규모의 AI 투자 펀드를 조성했다. 펀드 출범을 보고받은 손정의 회장은 "AI와 로보틱스가 세상을 바꿀 것이다. 이 분야 혁신 기술 기업을 초기에 발굴해야 한다"고 독려했다. 손 회장의 비전펀드가 최근 조성한 1080억 달러(약 131조원)의 2호 펀드도 AI에 집중 투자할 예정이다. 이 대표는 "최근 투자한 수아랩이라는 회사는 불량품을 자동으로 찾아주는 이미지 인식 AI로 제조 현장의 품질 관리를 혁신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수아랩은 삼성전자·LG전자·한화 등 국내 대기업뿐만 아니라 중국에도 기술을 제공하고 있다.

◇"기술에 의한 급변기, 사회 합의 필요"

소프트뱅크벤처스는 한국 스타트업들이 가장 투자받고 싶어하는 업체 중 하나다. 이 대표는 "모(母)회사인 소프트뱅크를 축으로 구축된 글로벌 네트워크 덕분에 해외 시장을 겨냥한 스타트업들이 특히 선호한다"고 말했다. 소프트뱅크는 세계적인 반도체 설계 기업 ARM의 대주주이자 세계 최대 차량 공유 업체 우버·디디추싱, 사무실 공유 서비스 업체 위워크 등의 주요 주주다. 스타트업 입장에서는 첨단 기술 확보부터 해외 시장 진출을 위한 거점·협력 업체 확보까지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대표는 "한국 경제를 이끌어왔던 전통 산업의 성장세가 꺾이면서 이제 남은 건 뛰어난 엔지니어 역량"이라며 "그 바탕 위에 선 스타트업들이 한국을 넘어 해외로 나가야 새로운 성장 동력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승합차 호출 서비스인 '타다'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에서 드러난 스타트업과 기존 산업계 갈등을 그는 어떻게 볼까. 이 대표는 "앞으로 AI가 더 진보하면 삶은 더욱 급변할 것"이라며 "이런 상황에서 서로 갈등만 하기보다는 사회 시스템 변화에 따라 어떻게 적응해야 할지 사회·정치적인 합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