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연합(UN) 산하 세계은행(World Bank)은 5명으로 구성된 인력개발(HR) 부서가 1만명에 이르는 직원들의 인사 관련 문서를 처리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람이 일일이 수작업으로 영어, 중국어, 프랑스어 등 다양한 언어로 작성된 수백가지 유형의 문서 양식을 분류하고 시스템에 입력해야 했다. 소수의 인력이 작업을 하다 보니 인적 오류가 불가피하게 발생했고, 여러 번 반복되는 검증 작업에는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적은 인원으로 방대한 양의 문서 처리가 가능해진 비결은 바로 로보틱 프로세스 자동화(Robotic Process Automation, RPA) 기술 덕분이다. RPA는 반복적이고 정형적인 대량의 업무를 자동으로 처리하는 기술로, 2000년대 초반 처음 등장했다. 최근에는 인공지능(AI)이 접목되면서 기술이 발전하고 있다. 세계은행은 HR 부서의 인사 관련 문서 관리를 소프트웨어 로봇인 ‘봇’에게 맡겼다. 수천 건의 문서를 분류하고 데이터를 추출, 입력하는 작업을 자동으로 처리하도록 프로세스를 개편했다. 봇에게 업무를 맡긴지 5주 만에 인사 관리 시스템의 40%를 자동화할 수 있었고 기존 프로세스 대비 70%나 시간을 절감했다. 그 결과 도입 첫 해에 1백만달러(한화 약 12억원)를 절약했다. 무엇보다 문서 처리 오류율은 ‘제로(0)’가 됐다.

봇이 사람이 정한 규칙에 따라 조회, 비교, 입력 등 단순 반복 업무를 자동으로 처리하는 동안 직원들은 보다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업무에 집중할 수 있다. 따라서 직원은 업무 만족도가 높아지고 기업은 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업무를 처리할 수 있다.

컴퓨터와 인터넷이 처음 업무 환경에 도입돼 일하는 방식에 혁신적인 변화가 일어났던 시기를 지나 이제 로봇, AI를 기반으로 4차 산업혁명의 물결이 거세지고 있다. 전 산업 영역에서 디지털 기술을 이용해 비즈니스의 모든 영역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새로운 가치 창출을 위한 혁신 전략을 모색하는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다.

전 세계 기업들은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을 위한 핵심 기술로 RPA를 주목하고 있다. 글로벌 인력 시장 조사 및 분석 기관 SSON(The Shared Services&Outsourcing Network)과 오토메이션애니웨어가 아시아태평양 및 호주, 뉴질랜드 지역 IT 담당자를 대상으로 진행한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68%가 1개의 RPA 솔루션을 도입했다. 32%는 2개 이상의 RPA를 도입한 것으로 나타났다. 프로세스 효율 향상(51%), 정확성 향상(45%), 예상 비용 절감(41%) 순으로 RPA 도입 성과가 있었다고 답했다.

국내 산업계도 RPA 도입에 속도를 내고 있다. 지난해부터 시행된 주 52시간 근무제와 최저임금 인상 등 정부 정책에 따른 사회·경제적인 변화 또한 RPA 도입을 가속화시키는 요인이다. 지난 7월 KDB미래전략연구소가 발표한 ‘국내 은행 RPA 도입 현황 및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2017년 이후 RPA를 본격 도입하기 시작한 국내 은행권은 초기에 백 오피스 중심으로 RPA를 도입했고 최근에는 여신, 외환 등 영업 관련 분야로 적용 범위를 확대하고 있다. 국내의 한 은행은 RPA 솔루션을 도입해 외화송금, 펀드상품 정보 등록, 퇴직연금 지급 등록 등 매일 발생하는 약 6000건에 달하는 업무를 자동화해 업무 효율성을 높였다.

금융권뿐 아니라 유통, 헬스케어, 제조 등 다양한 산업군에서도 RPA 도입을 모색하고 있다. 산업군을 막론하고 기업들은 어느 때보다 경쟁력을 제고하고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를 창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기업의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을 지원하는 RPA는 업무 프로세스에 대한 근본적인 분석에서 출발한다. 단순·반복적인 작업은 정확하고 빠르게 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 로봇이 수행하고, 사람은 사람만이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업무에 집중할 수 있도록 업무 환경 혁신이 일어나는 것이다. 필자가 속한 오토메이션애니웨어는 ‘사람에게서 로봇을 꺼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업무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한다(Take the Robot out of the Human)’는 비전을 가지고 있다.

앞으로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이 가속화되면서 AI, RPA와 같은 기술을 활용해 보다 많은 업무를 진행하게 될 것이다. 바야흐로 AI와 사람이 함께 일하는 시대가 열리면서 AI가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일과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창의적인 일, 사람 간 협업을 통한 혁신 업무를 파악해 각자 집중할 수 있도록 ‘일하는 방식’에 대한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러한 변화를 수용하는 것은 기업에게 새로운 도전 과제가 될 것이다. 하지만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인간과 AI의 역할, 일의 가치를 새롭게 정의해야 한다. 또한 각자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는 기업 환경을 조성해 미래 경쟁력의 탄탄한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이다.

◇필자 약력
인하대 항공우주공학과 졸업
한국델EMC BRS(백업 및 복구 시스템) 사업부 본부장
바이올린시스템(Violin Systems) 한국 지사장
카미나리오(Kaminario) 한국 지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