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자동차 부품사 만도의 연구실. 연구원이 전기차의 액셀 페달을 밟아 가속하다가 페달에서 발을 떼 관성으로 주행하고, 다시 액셀 페달로 가속하는 실험이 계속 이뤄졌다. 액셀 페달에서 발을 떼는 순간 차량 속도가 서서히 줄어들면서 전기차 배터리가 다시 충전됐다. 이곳은 '회생 제동' 부품 실험실이다. 가솔린·디젤 등의 내연기관차는 한 번 쓴 에너지를 다시 충전할 수 없지만, 하이브리드나 전기차는 배터리를 탑재하고 있어 에너지를 재충전해 활용할 수 있다. 관성 주행 때의 운동에너지 혹은 브레이크 페달을 밟았을 때 발생하는 마찰열로 충전한다.

미래 전기차 시대가 되면 이 많은 자동차 부품 중 70% 가까이가 사라진다. 엔진과 변속기를 모터와 배터리가 대체하면서 나타나는 변화다. 국내 자동차부품업계는 다양한 연구·개발을 통해 미래차 시대에 대응하고 있다. 사진은 폴크스바겐그룹 산하 스코다의 소형차 파비아를 부품별로 늘어놓은 모습.

만도 관계자는 "전기차 시대엔 회생 제동 부품 수요가 최대 3배까지 늘어날 전망"이라며 "회생 제동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낭비되는 에너지를 줄이는 실험을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회생 제동만 잘 사용해도 전기차 1회 충전 후 주행거리가 10% 가까이 늘어난다고 알려져 있다.

전기차 등 친환경차의 급부상에다 공유 차량 확산 등으로 완성차 수요가 감소하면서 자동차 부품사들도 위기에 처했다. 특히 전기차 시대엔 자동차 제작에 필요한 부품 수가 2만개에서 7000개까지 줄어들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차 부품 상당수가 엔진이나 변속기를 만드는 데 쓰이는데, 전기차엔 엔진과 변속기가 모터와 배터리로 대체되기 때문에 필요 부품 숫자가 확 줄어드는 것이다. 그렇다고 손 놓고 앉아 망하는 것을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 만도·현대모비스·한국타이어 등 국내 부품사들은 '위기가 곧 기회'라고 외치며, 연구·개발을 통해 미래 먹거리가 될 미래차 대응 부품을 발굴하고 있다.

공조·회생 수요 2배 늘어

자동차 에어컨 등 공조 부품은 지금까진 차량 실내 온도를 조절하는 데 쓰였다. 그러나 전기차 시대엔 실내 온도 조절뿐 아니라 전기차 배터리를 식히는 데에도 쓰일 전망이다. 고열을 내는 배터리는 통상 차 바닥이나 트렁크 쪽에 집중 설치되는데, 차량 전면부 흡기구로 들어오는 바람으로 열을 식히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배터리가 냉각되지 않으면 성능이 저하하고, 전력 공급이 끊길 위험도 있다. 한온시스템 관계자는 "전기차 시대가 오면 온도 조절용 부품 수요가 최대 2배까지 늘어날 전망"이라며 "전기차 플랫폼에 맞는 부품을 생산하기 위해 연구·개발에 집중 투자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는 자동차가 방향을 바꿀 때 앞바퀴만 조작하지만, 미래의 차는 바퀴 4개가 각각 별도로 조작될 전망이다. 바퀴 4개를 각각 움직이면 차를 90도로 움직이게 돼 평행 주차도 가능해지면서 주차 공간 활용도도 확 올라간다.

어떤 좌석 배치에서도 탑승객을 보호하기 위해 에어백은 시트에 내장됐다가 사고 순간 부풀어오르면서 탑승객을 뒤덮는 형태로 개발되고 있다.

아예 형태가 바뀌고 기능이 향상되는 차 부품도 나올 것으로 보인다. 자율 주행 기술 수준이 높아지면 운전석의 위치가 꼭 전방을 볼 필요도 없다.

운전석을 뒷좌석을 바라보도록 돌리고 가운데에 테이블을 넣으면 이동형 회의실이 된다. 이때 사고가 나면 탑승객들이 사방으로 튀어나갈 수 있지만 '에어백'이 차량 시트에 내장돼 사고 순간 부풀어올라 승객을 덮는 갑옷 형태로 진화할 전망이다. 차량 전면·측면 유리는 운행 정보와 관련된 증강현실 내비게이션처럼 구현되거나 대형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으로 쓰일 수 있다. 특허청에 따르면 차량 디스플레이 관련 특허는 2009~2012년엔 단 14건만 출원됐지만, 2013~2018년엔 113건이 출원됐다. 전기차는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까지 단 3~4초 만에 도달할 수 있다. 급가속 주행에도 타이어가 파손되지 않게 하기 위해 타이어 안쪽 공기를 뺀 '에어리스' 타이어 등 내구성을 높인 특수 제품이 필요하다. 차량이 앞뒤뿐 아니라 좌우로도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구(球)형 타이어도 개발된 바 있다. 부품업계 관계자는 "수익성 개선을 위해서라도 고부가가치 부품 개발에 매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대모비스 등 대기업은 개발 박차… 중소 부품업체들은 위기]

국내 부품 대기업들은 이 같은 고부가가치 부품 분야를 미래 먹거리로 보고 연구·개발에 나섰다. 현대모비스에 따르면 2014년 5000억원 수준이던 연구·개발 투자비가 매년 10% 이상 증가해 지난해엔 8500억원까지 올랐다. 같은 기간 연구원 숫자도 50% 이상 늘어 4000명을 넘어섰다. 그럼에도 국내 부품 대기업(상장사 89개사 기준)의 매출액 대비 연구·개발 투자 비중은 3.1%로 보쉬(7.6%), 덴소(8.8%), 콘티넨털(10.3%) 등 선진국 부품업계와 비교하면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나마 부품 대기업들은 이 같은 신제품 개발에 투자할 여력이 있지만, 중소 업체들은 투자 여력이 없어 어려움에 허덕이고 있다.

공기를 빼고 내구성을 대폭 높인 타이어 시제품. 전기차는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까지 단 3~4초면 도달하기 때문에 공기가 가득 찬 기존 타이어는 급가속 중 찢어질 가능성이 있다.

국내 전체 자동차 부품업계 연간 연구·개발 투자액(약 2조8000억원)의 대부분이 대기업에서 나온다. 한범석 자동차부품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지난해 부품업계 평균 영업이익률이 1.9%에 그칠 만큼 어려운 상황"이라며 "사실상 수직 계열화된 2·3차 협력업체들은 미래차 개발에 투자할 인력·자금의 여력이 없다"고 말했다.

이항구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부품사 육성을 위해 모든 대책을 가동해도 자율 주행 등 미래차 시대에 대응 가능한 부품사가 나올 가능성은 50%도 채 안 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