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만 더 버텨보면 어떻게든 풀리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이젠 정말 어디로 튈지 걱정됩니다. 기업이 가장 피하고 싶은 불확실성만 계속 높아지고…."

4대 그룹의 한 임원은 23일 청와대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파기 결정으로 일본이 추가 수출 규제 조치를 내릴 가능성을 걱정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언제, 어떤 방식으로 일본의 보복이 한국 기업을 덮칠지 가늠조차 안 된다"고 했다.

한·일 관계 악화로 한국 산업계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최근 일본이 한국 수출을 규제한 EUV(극자외선)용 포토레지스트(감광액)를 두 차례 허가하면서 양국 갈등이 숨 고르기에 들어갈 것으로 기대했지만, 지소미아 파기로 한 치 앞을 알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산업계는 일본이 오는 28일 한국을 화이트리스트국(수출 심사 우대국)에서 빼는 시행령 발효와 함께 추가 규제를 내놓을까 걱정하고 있다.

◇계속 높아지는 불확실성

51일째 일본산 불화수소 공급이 끊긴 반도체 업계의 우려가 가장 크다. 현재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공정에 투입하는 불화수소를 기존보다 10~20% 줄이며 비상 운영 중인 상태다. 이렇게 아껴 써도 재고량은 2개월 정도에 불과하다. 업계 관계자는 "소재 국산화와 공급 다변화가 성공해도 원하는 만큼의 불화수소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려면 빨라도 연말은 돼야 한다"고 말했다.

지소미아 파기로 한국 기업에 대한 글로벌 신뢰와 안전성이 떨어질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10대 그룹의 한 고위 임원은 "당장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큰 댐을 무너뜨릴 수 있는 작은 구멍이 생긴 것 같다"며 "안보 이슈로 인해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발생하지 않을까 다들 걱정한다"고 말했다. 한 중소기업 대표는 "그동안은 일본이 난리를 쳐도 대화의 길이 막혀있진 않다고 봤는데, 이젠 이런 기대도 어려워진 것 아니냐"고 했다.

◇日 28일 이후 추가 보복 가능

산업계에선 "일본이 디스플레이·반도체·기계 산업에 필수적인 소재를 추가로 수출 규제하거나, 관세 인상, 한국인 비자 발급 기준 강화 등과 같은 보복 조치에 나서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온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도 이날 간담회에서 "지소미아 종료 조치로 이번 수출 제한 경제 보복 조치를 대화로 풀어나가는 데 있어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며 "일본 조치가 장기간 이어지면서 경제에 주는 불확실성이 커질 수 있다"고 했다.

일본은 이미 예고한 대로 오는 28일 한국을 화이트리스트국에서 제외하고 비(非)전략물자에 대해 '캐치올 규제'를 시행한다. 이후 일본은 규제 대상 품목을 늘리거나 규제 강도를 강화할 수 있다. 한대훈 SK증권 연구원은 보고서에서 "당장 일본은 우리 산업계에 실질적인 피해를 주기 위한 전략을 사용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실제로 일본이 반도체 원판인 '실리콘 웨이퍼'를 비롯, 반도체 회로를 그릴 때 필요한 '블랭크마스크', 접히는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생산에 필요한 '섀도마스크'(FMM·파인메탈마스크) 등의 한국 수출을 추가로 규제하면 지금보다 더 큰 피해를 입게 된다. 이 역시 일본 의존도가 높은 소재들이다.

◇대미 수출에도 악영향 우려

지소미아 파기가 자칫 대(對)미 수출 환경까지 악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재계 관계자는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 대사 등이 최근 기업인들을 만나 '지소미아가 유지됐으면 좋겠다'고 했다"며 "특히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삼성전자가 애플을 위협하고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상황에서 한·미 관계 악화 시 언제든 한국 기업들이 미국 정부의 타깃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외환시장, 주식시장에도 좋지 않다. 전문가들은 일본의 맞대응이 한층 강경해지고 한·미 동맹에 균열이 발생하면 본격적으로 원화 자산을 '팔자'는 움직임이 일어날 수 있다고 본다. 이진우 메리츠종금증권 연구원은 "한·일 무역 갈등이 역내 지정학적 위험에 대한 우려로 번질 경우, 우리나라의 국가 부도 위험을 나타내는 CDS(신용 부도 스와프) 프리미엄과 원화 환율이 동반 상승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