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의 프로축구팀 AFC아약스의 홈구장 '요한 크루이프 아레나'는 축구의 성지(聖地)이면서, 동시에 암스테르담 최대 규모의 '배터리'이기도 하다. 이 축구장은 낮 동안 축구장 천장에 설치된 태양광 발전 패널로 생산한 전기를 축구장 지하의 에너지 저장 시스템(ESS)에 저장한 뒤, 저녁에 경기가 있을 때 필요한 전력을 꺼내 쓴다. 전력을 저장할 수 있는 용량은 암스테르담 7000가구에 1시간 동안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수준이다.

축구장 지하에 들어간 배터리는 전부 닛산의 전기차인 '리프'에서 나온 것이다. 이 시스템을 공급한 영국의 전력관리 기업 이튼은 "폐차된 차량의 배터리만 뜯어내 재포장한 뒤 ESS로 재활용한 제품"이라며 "유럽 내 5~6곳의 축구장이 폐배터리를 활용한 ESS 구축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최근 밝혔다.

닛산이 전기차 폐배터리로 만든 ‘전선 없는 가로등’ 시제품.

폐배터리는 그냥 폐기하면 환경을 오염시키지만, ESS 등으로 재활용하면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이 사업이 활성화되면 전기차 보급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높은 배터리 가격도 낮출 수 있을 전망이다. 미국 블룸버그는 "전기차 배터리로 한 번 팔고, 재활용할 때 한 번 더 팔 수 있으므로 한 제품으로 두 번 매출을 올리는 것"이라며 "공급 업체가 배터리 가격을 재조정할 여지가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시장조사업체 네비건트리서치에 따르면, 2015년 1600만 달러(약 190억원) 규모에 불과했던 중고 배터리 시장은 2035년엔 30억달러(약 3조6500억원)로 확대될 전망이다.

◇전기차 폐배터리에 뛰어든 車 업체들

전기차 배터리는 5~10년 정도 쓰더라도 재활용이 가능하다. 충전 성능이 기존 대비 60~80% 정도로 떨어지는데, 전기차에선 쓰기 어려워도 ESS로 쓰는 데는 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폐배터리를 ESS로 용도를 전환할 경우 10년 이상 사용이 가능한 것으로 알려졌다. 런던의 배터리 컨설팅 업체 '순환에너지 컨설팅'의 창업자 한스 멜린은 "리튬 이온 배터리엔 정해진 수명이 따로 없다"면서 "손전등에서 안 되는 배터리를 TV 리모컨에 넣었을 때 작동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라고 설명했다.

이에 다양한 완성차 업체들이 이 사업에 뛰어들고 있다. 닛산은 '전선이 필요 없는 가로등'을 개발했다. 가로등 상부에 태양광 발전 패널이 달려 있고, 땅속에 묻는 부분엔 배터리가 설치돼 있다. 스스로 전력 공급이 가능해 전선에 연결하지 않고도 불빛을 낼 수 있다.

폴크스바겐은 내년부터 이동형 전기차 충전기를 생산해 공급할 예정이다. 부족한 충전 인프라를 쉽게 늘릴 수 있다. 도요타는 프리우스 하이브리드 차량에서 나온 배터리를 편의점 업체인 세븐일레븐에 공급할 계획이다. 이 외에도 테슬라·BMW·다임러 등 수많은 업체가 재활용 배터리 ESS 산업에 뛰어든 상태다.

◇얼어붙었던 한국 시장도 활성화 전망

한국은 상대적으로 뒤처져 있다. 최근 2년 새 국내 설치된 ESS 22곳에서 잇달아 화재가 발생하면서 사업 계획을 세웠던 업체들이 집행을 미루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최근 들어 배터리 보호 설비 시스템을 강화하고, 운용 및 관리가 더 철저해지면서 다시 폐배터리 재활용 시장이 활성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BMW코리아는 지난 9일 제주도에 국내 최초로 전기차 배터리를 재사용한 전기차 충전소 'e-고팡'을 지었다. BMW의 전기차 i3에서 나온 폐배터리로 만든 ESS에 풍력 발전으로 생산한 전기를 저장했다가 전기차를 충전할 때 쓴다.

현대차는 지난 6월 산업부·환경부 등 정부 부처, 제주·경북 등 지자체와 협업해 제주도에 국내 첫 '전기차 배터리 산업화 센터'를 지었다. 전기차에서 안전하게 배터리를 회수하고, 이를 ESS로 만드는 시설이다. 올해 말까지 연간 1500대 분량의 전기차 배터리 재활용 시설을 만들기로 했다. 김필수 대림대 교수는 "배터리 재활용이 활발해지면 환경오염 문제도 해결하고 새로운 시장도 생겨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