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말 사측과의 올해 임금과 단체협약 협상 결렬을 선언하며 파업을 예고했던 현대자동차노조가 고민에 빠졌다. 최근 일본의 경제제재로 국내 산업계의 어려움이 가중되면서 파업에 따른 비난 여론이 거세질 것이라는 우려가 커졌기 때문이다.

현대차 노조 조합원들이 지난 6월 8일 울산 현대차 문화회관에서 올해 임단협 요구안을 확정하기 위한 대의원대회를 열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현대차 노조는 12일 낸 긴급성명을 통해 "사측이 노조의 핵심요구를 전향적으로 수용하고 일괄 제시안을 내놓는다면 추석 전 임단협을 타결할 수 있도록 힘쓰겠다"라는 입장을 전했다.

노조는 또 "일본의 수출규제 경제도발을 규탄하지만, 이를 악용해 합법적이고 정당한 투쟁을 제한하거나 왜곡하는 데는 단호히 반대한다"며 "사측이 일괄 제시안을 내놓지 않으면 생존권 쟁취를 위해 최선의 투쟁을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노조의 성명은 최근의 한·일 갈등으로 예년과 같이 파업을 전개하기 어려워진 데 대한 고민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의 경제제재로 국내 경제에 ‘비상등’이 켜진 상황에서 파업을 강행할 경우 국가적 어려움을 무시한 채 제 밥그릇만 챙기려 한다는 화살을 맞을 가능성이 커 노조의 고민이 깊어진 것이다.

자동차 업계에서는 올해 현대차 노조가 파업에 나설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다. 정년연장과 상여금 통상임금 적용 등 노조의 임단협 핵심 요구사항에 대해 사측이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뜻을 보이면서 노사간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

노조 내부에서도 파업을 지지하는 의견이 많았다. 지난달 29일과 30일 이틀에 걸쳐 진행된 노조의 파업 찬반투표에서는 전체 조합원들의 70.5%가 찬성표를 던졌다. 투표에 참여한 조합원들 가운데 84.1%가 파업에 찬성한 것으로 집계됐다.

그러나 지난달 일본 정부가 한국에 대해 반도체 첨단소재에 대한 수출 규제에 나선 이후 불거진 양국의 경제 갈등이 변수로 떠올랐다. 게다가 지난 2일에는 일본이 한국을 수출 절차 간소화 대상국, 이른바 ‘화이트리스트’에서도 배제하기로 해 국내 산업계의 위기가 커지면서 노조 내부에서도 "지금은 파업에 나설 때가 아니다"라는 의견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현대차의 글로벌 판매 부진이 지속되고 있는 점도 노조가 파업을 강행하기 부담스러워진 이유로 꼽힌다.

현대차의 대형 SUV 팰리세이드. 팰리세이드는 지난달부터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판매되고 있다.

올해 상반기 현대차의 내수와 해외 판매를 합친 전체 판매대수는 247만8761대로 지난해 상반기보다 4.2% 감소했다. 올해 팰리세이드와 신형 쏘나타 등 신차를 잇달아 출시했지만, 미국과 중국에서의 판매 부진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지난해에 비해 오히려 판매실적이 뒷걸음질한 것이다.

현대차는 지난달부터 미국 시장에서 대형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팰리세이드를 본격적으로 판매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판매되는 팰리세이드는 전량 국내 울산공장에서 생산돼 수출된다.

만약 노조가 비난 여론을 무시한 채 파업에 나선다면 팰리세이드는 미국에서의 판매 물량을 제대로 확보하기 어려워진다. 최근 미국에서 SUV를 중심으로 판매 라인업을 재편해 올해 간신히 판매실적을 반등시키는 데 성공한 현대차는 팰리세이드가 안착하지 못하면 다시 지난해의 부진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 이 경우 노조는 제 잇속을 챙기기 위해 회사의 발목을 잡는다는 거센 비난을 피하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금속노조의 ‘맏형’ 격인 현대차 노조의 파업 여부는 기아자동차, 한국GM 노조의 움직임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며 "여론을 무시하고 파업을 강행할 경우 민주노총 금속노조 전체가 거센 역풍을 맞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