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한국에 수출 규제 조치를 내린 배경에 일제 강제징용 노동자 배상 판결과 같은 정치·외교적 이유 외에도 한국의 IT(정보기술) 산업을 견제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한국의 반도체·디스플레이 경쟁력에 타격을 줘 인공지능(AI)·5G(5세대 이동통신)·자율주행차 등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우리나라 입지를 약화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SK증권은 보고서에서 "한국이 세계 IT 산업에서 가지는 입지가 엄청나게 커지다 보니 견제에 직면한 것"이라며 "일본의 부국강병과 미국의 중국 견제라는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압박이 거세지고 있다"고 밝혔다.

AI·자율주행차 등 미래 기술의 핵심 부품 가운데 하나인 메모리 반도체에서 한국의 영향력은 압도적이다. 8일 대만의 시장 조사 업체 D램익스체인지에 따르면 올 2분기 세계 D램 시장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각각 점유율 45.7%, 28.7%를 차지했다. 한국산(産) D램의 점유율이 전체의 74.4%였다. 특히 삼성전자는 지난 1분기보다 3%포인트 상승하면서 2017년 4분기 이후 6분기 만에 최고 점유율을 기록했다. 반면 미국 마이크론은 점유율이 2.5%포인트 하락하면서 간신히 20%를 지켰다. 세계 낸드플래시·OLED(유기발광다이오드) 디스플레이 시장에서도 한국은 세계 1위이다.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분야에선 삼성전자가 2위까지 치고 올라왔다.

이는 1980년대와 상반된 모습이다. 당시에는 일본 NEC·히타치·도시바가 세계 메모리 반도체 1~3위를 독식했다. 하지만 이후 삼성전자 등 한국 기업들은 일본을 따라잡기 위해 미세 공정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면서 공정 기술 개발에 나섰고, 그 결과 한국 메모리 반도체는 일본을 따돌리고 세계 1위 자리를 차지했다. 이종호 서울대 교수(전기공학부)는 "일본은 자신들로부터 기술을 전수받은 한국이 일본산 소재를 싸게 가져와 비싼 반도체로 만들어 이익을 남긴다고 본다"며 "(이번 수출 규제는) 한국을 견제해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 IT 산업 주도권을 갖고 오겠다는 의도도 있다"고 말했다.

미국이 중국 견제를 위해 한·일 중재에 적극 나서지 않는다는 해석도 있다. 일본의 한국 반도체·디스플레이에 대한 견제는 화웨이 등 중국 IT 업체에 단기적 타격을 줄 수 있다. 중국 시안에 있는 삼성전자 낸드플래시 공장이나 우시에 있는 SK하이닉스 D램 공장은 중국이 쓰는 메모리 반도체의 최대 공급처다. 삼성전자는 2030년까지 133조원을 투입해 파운드리 등 비(非)메모리 반도체 세계 1위를 차지하겠다고 밝혔다. 중국이 비메모리 반도체도 한국 업체로부터 공급받을 수 있다는 의미다.

미국이 자국 반도체 기업인 마이크론·인텔 등의 영향력 확대를 노리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한국이 일본의 화이트리스트국 대상에서 빠지면서 미국 기업들이 한국 기업들보다 훨씬 원활하게 소재를 공급받고 적기에 반도체를 생산할 수 있다. 황철성 서울대 교수(재료공학부)는 "이번 사태는 미국 입장에서는 꽃놀이패"라며 "한국 반도체 기업의 경쟁력이 줄면 마이크론·인텔이 수혜를 볼 뿐 아니라 중국에도 타격을 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