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가 한국에 대한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를 강화한 지 한 달이 넘어가면서 수요자인 한국 기업뿐 아니라 공급자인 일본 기업도 규제를 회피하기 위한 공급망 다변화에 뛰어들고 있다. 한국 기업이 일본 밖에서 대체재를 찾자 일부 일본 기업이 해외에서 생산한 '제3국 제품'을 한국에 공급하는 방식으로 고객 지키기에 나선 것이다.

◇중국·벨기에 공장 통해 한국으로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9일 "불화수소 제조업체 모리타화학공업이 연내 가동을 시작하는 중국 공장에서 불화수소를 생산해 한국에 수출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모리타화학공업은 일본 스텔라케미파와 함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불화수소 대부분을 공급해 온 기업이다. 모리타 야스오 사장은 "(수출 규제가 본격화된 이후) 지금까지 수출 허가가 나지 않았고, 갖춰야 할 서류도 3종에서 9종으로 늘어났다"면서 "한·일 간에 비슷한 문제가 계속되면 한국에 보내는 물량을 일본 대신 중국에서 실어 보낼 수도 있다"고 밝혔다.

불화수소뿐만이 아니다. 반도체 회로를 그리는 데 쓰이는 포토레지스트(감광액) 제조업체들도 한국 반도체 업체를 위한 공급망 변화를 꾀하고 있다. 일본 화학업체 JSR은 이 회사의 벨기에 루뱅(Leuven) 공장에서 생산한 포토레지스트를 최근 삼성전자에 공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JSR 벨기에 공장을 통해 삼성전자의 포토레지스트 재고가 6개월치 이상 확보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JSR과 더불어 삼성전자에 7㎚(나노미터·1나노미터는 10억분의 1m)급 초미세 반도체용 포토레지스트(감광액)를 독점 공급해 온 일본 도쿄오카공업(TOK)도 인천 송도에 있는 한국 공장의 증산(增産) 계획을 검토하기 시작했다고 니혼게이자이는 보도했다.

현 상황은 일본 정부가 생각하지 못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일본 마이니치신문은 "(일본) 정부의 수출 규제 이후 한국의 일본 상품 불매운동, 지자체와 스포츠 분야 교류 중단 등이 생겼다"며 "일본 정부 관계자는 '예상 이상으로 소동이 커졌다'며 오산이 있었음을 인정했다"고 보도했다.

◇한·일 분업의 실리 택한 일본 기업

일본 업체들의 이러한 움직임은 사태 장기화로 한국 반도체 업계가 적극적으로 대체품 발굴에 나선 이후 본격화하고 있다. 고객이 떨어져 나갈 가능성이 현실화되면서 일본 기업들이 자국 정부 방침과는 별개로 실리(實利)를 택하는 것이다.

불화수소의 경우 국내 업체인 솔브레인은 9월 완공 예정인 제2공장을 통해 초고순도 제품을 생산해 공급할 예정이다. 박영수 부사장은 "새 공장에서 만든 불화수소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테스트를 통과하면 일본 규제로 물량 부족이 생기는 액체·기체 불화수소를 대체할 수 있을 것"이라며 "최대한 빨리 테스트를 마치고 공급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SK머티리얼즈도 기체 불화수소 샘플을 만든 뒤 검증 절차를 밟고 있다. 동진쎄미켐과 금호석유화학 등 국내 포토레지스트 업체들도 1~3년 안에 일본산 제품을 대체하는 것을 목표로 제품 개발을 나섰다.

반도체 업계는 일본 정부의 수출 규제가 유지 또는 강화되면 일본 반도체 소재 기업들의 '탈(脫)일본' 현상이 가속화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국내 반도체 기업 고위 관계자는 "한·일 양국 기업 모두 기존의 공급 관계를 유지하는 쪽이 서로 이득"이라며 "(우방국인) 미국이나 유럽에 공동 투자를 해 합작 소재 기업을 만드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