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산 웨이퍼·마스크·불산 등 반도체·디스플레이 생산에 필수적인 재료 수급이 차질을 빚으면서 일본으로부터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부품·장비 50% 이상을 수입하던 한국 반도체·디스플레이 회사들이 직격탄을 맞았다. 국내 업체들은 부랴부랴 재고 확보·공급선 다변화를 추진했다. 정부는 한국이 이른바 ‘가마우지(목에 줄이 감긴 물새) 경제’라고 개탄하면서 소재·부품·장비 국산화가 절실하다고 했다. 생선(완제품)을 먹고 싶어도 목에 줄(일본 소재·부품산업)이 묶여 있어 운신의 폭이 좁다는 것이다.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으로 전 세계 공급망이 붕괴된 때 이야기다. 당시 자연재해로 일본 업체들의 소재, 부품 생산이 차질을 빚으면서 전 세계 공급망이 연쇄 타격을 입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은 모든 역량을 투입해 재고를 확보하고 공급선 다변화에 나섰다. 덕분에 당장 급한 문제는 3~6개월만에 해결됐다.

문제의 실타래가 풀리기 시작하자 국산화를 외쳤던 정부도 2013년부터 관련 예산 규모를 매년 줄이기 시작했다. 산업부 소관 반도체 분야 연구개발(R&D) 사업 지원 예산을 보면, 2012년 1010억원가량을 투입했던 예산은 2017년 말 314억원대로 3분의 1 토막 났다. 삼성·SK하이닉스가 돈 많이 버는데, 생태계 육성에 굳이 돈 쓸 필요가 있냐는 취지였다.

실제로 이 시기는 두 회사가 이례적인 ‘반도체 수퍼호황’에 최대 매출을 매해 경신하던 때다. 반면 반도체 장비 국산화율은 21%(2013년)에서 18%(2017년)로 뒷걸음질 쳤고, 반도체 소재 국산화율도 2011년 이후 48%대에서 횡보했다.

7일 서울 양재동에서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한국공학한림원·한국과학기술한림원이 공동 개최한 ‘일본의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 수출 규제에 대한 과학기술계 대응 방안’ 긴급 토론회에서 박재근 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장은 "동일본 대지진이 나고 6개월이 지나니 국산화 이야기가 쏙 들어갔다"면서 "그때 준비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반도체를 35년간 연구한 학자로서 이번에도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을지 우려된다"고 했다.

그런 조짐은 이미 정부가 연초 시끌벅적하게 추진했던 비메모리 반도체(시스템 반도체) 육성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당시 삼성전자가 비메모리에서도 글로벌 1등을 하겠다며 2030년까지 133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정부도 매년 1조원을 투자하겠다며 화답했다. 여기에는 자체 투자금액 외에도 전·후방 생태계를 동반 육성하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그러나 최근 만난 한 중소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비메모리 육성을 담당했던 정부 관계자들이 일본 수출규제 대응에 매달려 있기 때문에 관련 지원 논의가 올 스톱된 상황"이라고 전했다. 비메모리 육성 또한 10년 전, 20년 전부터 정부가 의지를 갖고 논의해왔던 사안이다. 업계에서는 이번에도 흐지부지 될 것으로 우려한다.

미·중 무역분쟁, 한·일 경제전쟁 등 최근 전 세계가 보호 무역주의로 흘러가며 각자도생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일본 수출규제가 어느 정도 숨통을 트는 시점이 오더라도 언제 어디서든 제2의, 제3의 수출규제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만은 반드시 큰 그림을 그리고 길게 투자해야 "일본 수출규제 때 국산화를 했었더라면" 하는 개탄이 다시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