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수록 격화되는 한·일 경제 갈등에다 미·중 환율 전쟁이라는 초대형 악재가 겹치면서 금융시장이 연일 요동치고 있다. 정부는 7일 아침 홍남기 경제부총리, 최종구 금융위원장,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 윤석헌 금융감독원장이 한자리에 모여 시장과 거시경제 상황을 점검했다. 회의에서 나온 정부 메시지는 전과 다를 게 없었다. "대외 여건에 따라 시장이 수시로 불안해질 수 있지만, 한국 경제의 기초 체력과 한국 시장에 대한 신뢰는 굳건하다"는 얘기다.

과연 그럴까. 본지가 국내 대형 증권사에 의뢰해 올해 우리나라 주가와 환율 변동을 주요 20개국(G20) 회원국과 비교해 봤더니 증시는 선진국 가운데 유일하게 떨어졌고 원화 가치는 아르헨티나(20%)에 이어 두 번째로 낙폭이 컸다. 같은 악재에 노출됐는데 유독 우리 금융시장이 취약한 것이다. 7일에는 미국 증시가 반등(6일 종가 기준)했는데도 우리나라 코스피는 0.4% 떨어졌다.

◇약골로 전락한 국내 금융시장

국제 비교를 위해 MSCI지수로 환산한 우리 주가지수는 연초에 비해 6일까지 1.1% 떨어졌다. 쏟아지는 대외 악재 탓이라지만 미국과 유로존 등 선진국 주가가(5일 마감 기준) 연초 대비 10% 넘게 오른 것과 대조된다. 우리와 경제 전쟁을 벌이는 일본도 6일까지 연초보다 1%가량 주가가 올랐다. 올해 주가가 떨어진 주요 20개국 회원국은 멕시코(-6.5%), 인도(-2.0%), 인도네시아(-0.5%)쯤인데 모두 신흥국이면서 금융시장이 강건하지 않은 나라들이다.

문재인 정부는 시장이 불안한 모습을 보일 때마다 우리 경제가 국민소득 3만달러를 넘겼고, 국가 신용 등급이 더블A를 유지하고 있다고 큰소리를 쳐 왔다. 그러나 투자자들은 더 이상 이런 말에 신뢰를 보내지 않는다. 나라의 경제력을 반영한다는 통화 가치 변화를 보면 이런 투자자들의 인식이 그대로 반영돼 있다. 우리나라 원화는 올해 들어서만 8.9% 가치가 떨어졌다. 브렉시트 우려로 경제 심리가 엉망인 영국(-4.4%)이나 미국과 전면전으로 외자(外資) 유출 우려가 비등한 중국(-2.3%)보다 더 나쁘다. 작년부터 심각한 경기 침체를 겪고 있는 아르헨티나(-20.7%) 외에는 우리만큼 통화 가치가 떨어진 나라가 없다. 대형 증권사 투자담당 임원은 "외국인이 아니라 국내 개인 투자자들, 즉 우리 스스로 주가와 원화에 대한 신뢰를 주지 않고 있다"며 "개미들이 주식을 팔아치우고, 달러와 금에 몰리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했다.

◇금융시장 부진은 '펀더멘털(기업 이익 하락)'탓, 정부가 직시해야

우리나라는 수출 의존도가 50%를 넘는 개방형 경제로 1990년대 이후 번영을 구가해왔다. 대신 국제 금융시장에 악재가 돌출하면 금융시장이 유독 크게 움직이는 부작용이 나타나곤 했다. 그래도 올해처럼 글로벌 증시 흐름과 반대로 움직이지는 않았다. 작년과 재작년 주가지수를 들여다보면 우리 증시가 대체로 선진국과 신흥국 사이의 중간 정도에서 움직인 것이 확인된다. 그런데 올해 들어서는 이런 흐름이 깨지기 시작한 것이다.

상당수 증권 전문가들은 그래서 최근 금융시장 부진의 제1 원인을 '펀더멘털'에서 찾는다. 한 증권사 임원은 "주요 선진국 대표 기업들의 주당 순이익 비율(EPS)이 올해 1분기에 전년 대비 0~1%가량 늘어났는데 우리 대표 기업들은 대부분 10% 넘게 빠졌다"며 "기업이 돈을 벌지 못하니 실적이 추락하고, 투자자들이 불안해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했다. 기업 이익 부진은 기본적으로 반도체 경기 하락과 수출 감소 탓이다. 정부도 그동안 '하반기 반도체 경기가 회복되면' '글로벌 환경이 나아지면'이라는 조건하에 경제가 회복될 것이라는 낙관론을 펴 왔다. 그러나 경제 전문가들은 "글로벌 시장의 규칙이 자유무역에서 보호무역으로 바뀌고, 안보 위협이 급격히 높아지는 구조적인 변화 탓에 우리 기업이 과거처럼 경기 반등만으로 살아나기 어려운 환경에 몰려 있다"고 경고한다.

전직 경제 장관들은 문재인 정부가 이런 환경 변화에 세심한 대응책을 내기는커녕 역(逆)주행 정책으로 금융시장에 부담을 더해주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적폐 청산, 최저임금 인상, 주 52시간 근로제 도입, 일본과의 경제 전쟁 등 현 정부 정책들이 기업을 옥죈다는 얘기다. 전광우 전 금융위원장은 "금융시장의 변동은 일종의 신호"라며 "정부의 현안, 한·일 간의 충돌을 해결하는 데 정부 대책에 대한 신뢰를 못 갖는 게 아닌가. 그래서 이런 시장 충격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했다. 최중경 전 청와대 경제수석은 "경제주체가 그만큼 경제를 안 좋게 보는 것"이라며 "특히 환율은 수출이 부진에서 헤어나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돼 급등한 것"이라고 했다. 전직 고위 경제 관료는 "이 정부 입장을 보면 '(금융 불안에) 민감하게 반응할 거 없다' '펀더멘털은 문제없는데 시장이 신경질적이다'는 식"이라며 "그러나 그게 곧 시장이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근저에 우리 경제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이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