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일본의 대(對)한국 화이트리스트 배제 조치에 맞서 100대 핵심 전략 소재·부품·장비를 1~5년 내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반도체·디스플레이·자동차·전기전자·기계금속·기초화학 등 6개 분야 핵심 품목을 뽑아 국산화와 수입 다변화를 통해 안정적인 수급 체계를 확립하겠다는 것이다. 일본의 자국산 소재 무기화에 대한 정부의 맞대응 대책이다.

5일 오전 정부 서울청사에서 열린 '소재·부품·장비 경쟁력 강화 방안' 합동 브리핑에서 유영민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왼쪽부터),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윤종인 행정안전부 차관, 최종구 금융위원장이 핵심 품목의 독립 방안에 차례대로 설명을 하고 있다.

반도체 등 산업계는 일단 환영 분위기다. "뒤떨어진 국내 소재·부품 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뒤늦게나마 지원책을 제시한 것은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조치가 근본 대책이 될 수는 없다는 반응도 적지 않다. 전자제품 제조 업체의 한 관계자는 "국내 소재·부품 산업의 기술력·공급 단가와 같은 복잡한 경제 문제를 무시한 현실성 없는 낙관론"이라며 "수십 년간 산업계에서 치열하게 도전과 실패를 반복해온 국산화 문제가 1~5년 만에 뚝딱 해결될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예산·금융·규제 특례 등 총력 투입해 소재·부품 산업 육성

정부는 5일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주재로 관계 장관회의를 열고, '대외 의존형 산업구조 탈피를 위한 소재·부품·장비 경쟁력 강화대책'을 확정·발표했다. 예산과 금융, 세제, 규제 특례 등 가능한 모든 수단이 총망라됐다. 정부는 업계 의견과 전문가 검토를 거쳐 100개 품목을 선정했다. 일본 정부가 지난 4일부터 수출 규제를 강화한 불화수소(에칭가스)와 같이 수급 위험이 크고 주력 산업에 미치는 영향이 큰 20개 품목은 1년 안에 안정적인 공급선을 확립한다. 밸류체인(가치 사슬)상 취약 품목이면서 자립화에 시간이 필요한 소재·부품·장비 80개 품목은 5년 안에 공급 안정화를 추진할 방침이다.

20개 품목은 미국, 중국, 유럽연합(EU) 등 대체 수입국을 신속히 확보하는 한편 2732억원의 추가경정예산을 투입해 핵심 기술 조기 확보에 나설 계획이다. 기술 자립에 다소 시간이 소요되는 중장기 80개 품목에 대해선 예비타당성조사 면제 등을 통해 신속하게 연구·개발(R&D) 재원을 집중 투자하는 등 2020년부터 2026년까지 7년간 7조8000억원을 투입하기로 했다.

국내에서 단기간 기술 확보가 어려운 분야는 글로벌 소재·부품·장비 기업의 인수·합병(M&A)이나 해외 기술 도입, 해외 투자 유치 등을 추진한다.

해외 기술 기업을 인수하는 기업에는 2조5000억원 이상의 인수 자금을 지원하고, 법인세 세액공제 혜택도 제공한다. 화학물질 등을 취급하는 시설의 인허가와 기존 사업장의 영업허가 변경 신청을 기존 75일에서 30일로 단축하는 규제 완화도 시행한다. 연구·개발을 위해 연장 근로가 불가피한 경우 특별 연장 근로를 인가하기로 했다. 일본의 경제 보복으로 경영상 어려움을 겪는 소재·부품 관련 기업에는 대출·보증을 1년간 전액 만기 연장하고 올 하반기엔 소재·부품 분야에 정책 자금 29조원을 신속히 집행하기로 했다.

◇경제·산업계 "일단 환영"… 실효성에는 갸우뚱

산업계에서는 이번 대책을 환영하면서도 실효성에는 의구심을 나타냈다. 예컨대 일본의 수출 규제로 벌써 한 달째 반입되지 않는 일본산 고순도 불화수소의 경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총력전으로 국내와 해외의 대체 공급선을 뒤지고 있지만 여전히 해법을 찾지 못했다. 국산은 물론이고 중국·대만산 불화수소까지 모두 테스트하고 있지만, 일본산만큼의 순도를 확인하지 못했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순도 99%를 만드는 것은 쉽지만 99.999% 이상을 만드는 건 그보다 한참 어렵다"며 "일본 업체들은 수십 년간 한 분야에 집중해 쌓아온 기술력을 단 1~5년 안에 같은 수준으로 따라잡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낮은 순도를 쓰면 불량률이 높아지지만 당장 급하니 이를 감내하겠다는 것"이라며 "세계 최고 품질을 써야, 세계 최고의 D램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미세 나노 공정에 필요한 극자외선(EUV)용 포토레지스트(감광액)는 사실상 일본 업체가 독점 생산 중이라 이를 국산화하거나 대체하는 데까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는 상태다.

배터리를 감싸는 핵심 부품인 파우치 필름을 전량 일본에서 수입해온 배터리 업계도 마찬가지다. 국내 배터리 업체는 일본 외에 새로운 수급 루트를 찾느라 고심 중이다. 아무리 낙관적으로 봐도 국산 파우치 필름이 일본산과 비슷한 품질 수준이 되려면 1~2년은 걸린다는 게 업계의 정설이다. 그나마 비슷한 수준일 뿐, 미세한 품질 차이까진 언제 따라잡을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과거 실패 사례도 있다. 2010년 정부는 5년 안에 국산 반도체 장비 점유율을 35%까지 끌어올리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아직도 국산화율은 20% 수준이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모든 것을 국산화하겠다는 것은 오히려 비효율적인 산업 구조를 유발해 장기적으론 우리 제품의 경쟁력을 저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