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아침 시중은행 외환딜러 A씨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달러 대비 원화 환율이 마지노선으로 여겨지던 1200원을 넘겨 거래를 시작하더니 오전 9시 40분부터 치솟기 시작해 1시간 만에 1218원까지 올랐기 때문이다. 환율이 이렇게까지 급등(원화 가치 하락)한 것은 10년 전 글로벌 금융 위기 때나 보던 일이다. A씨 컴퓨터 화면에는 '위안화, 11년 만에 장중 달러 대비 7위안 돌파(가치 하락)' '증시 1950선 위협'이라는 뉴스 제목이 연신 깜빡였다.

일본의 경제 보복에 미·중 무역 전쟁의 충격파까지 덮친 5일, 환율과 증시는 3년여 만에 고점(高點)과 저점(低點)을 갈아치우며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금융권 전문가들은 "우리나라는 일본과의 경제 전쟁이라는 악재까지 겹치면서 경쟁국에 비해 변동 폭이 컸다"고 분석했다.

◇'3대 마지노선' 한꺼번에 무너져

이날 금융 불안의 직접 원인은 위안화 가치 하락이었다. 지난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3000억달러어치 중국 제품에 관세 10%를 부과하겠다고 나서자, 중국은 위안화 가치 하락(환율 상승)으로 응수했다. 자국 통화 가치를 떨어뜨려서라도 무역 전쟁에서 밀리지 않겠다는 중국의 메시지에 아시아 금융시장 전체가 새파랗게 질렸다. 일본과 중국 증시가 1.5% 넘게 빠졌고, 홍콩 항셍지수는 2% 넘게 떨어졌다.

국내 금융시장은 충격이 한층 컸다. 환율, 코스피, 코스닥의 심리적 지지선이 한꺼번에 무너졌다. 코스피는 1946.98에 거래를 마쳐 1950선이 무너졌다. 2016년 6월 28일(1936.22) 이후 3년 1개월 만의 최저치다. 외국인과 개인이 각각 3142억원, 4436억원을 팔아치웠다. 기관 투자자들이 7355억원을 사들이면서 지수 방어에 나섰다. 업계 관계자는 "국민연금이 방어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으로 보이지만 지수 하락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고 말했다.

코스닥은 7.46% 떨어진 569.79에 거래를 마쳤다. 2015년 1월 8일(566.43) 이후 가장 낮은 수치로, 역시 지지선이었던 600선이 장 초반부터 무너졌다. 하루 낙폭으로는 12년 만의 최대치다. 한국거래소는 코스닥 시장에 장중 사이드카(Sidecar·코스닥이 6% 이상 하락한 상태가 1분간 지속될 때 5분간 거래를 정지시키는 조치)를 발동하기도 했다. 사이드카 발동도 3년 2개월 만이다. 달러 대비 원화 환율은 2016년 3월 9일(1216.2원) 이후 3년 5개월 만의 최고치인 1215.3원에 마감했다. 역시 심리적 지지선인 1200원을 훌쩍 넘은 것이다.

증권가에선 우리만 유독 더 크게 하락한 점을 불안해하고 있다. 김영환 KB증권 연구원은 "외국인 중심으로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배제 영향이 국내 기업들의 생산 차질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타나고 있다"며 "증시가 더 하락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코스닥 시장은 대외 악재에다 바이오주 투자 위축 등으로 당분간 반등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국내 대형 증권사 투자담당 임원은 "일본 문제에 대한 정부 대책이 미진하다는 투자자들 불안이 증시의 하락 폭을 키웠다"며 "이를 불식하지 않으면 당분간 시장이 더 불안해질 것"이라고 했다.

◇정부 "문제없다"고 큰소리쳤지만…

문재인 정부는 지난달 일본의 경제 보복 문제가 불거진 이후 줄곧 "금융시장에는 충격이 없을 것"이라고 자신해왔다. 정부는 5일 오전에도 관계기관 금융상황 점검회의를 소집해 "우리 금융시장에 대한 글로벌 투자자들의 평가에 큰 변화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1시간도 안 돼 환율과 증시가 급격히 출렁이면서 그동안의 큰소리가 무색해지게 됐다. 외환 당국은 환율이 급등하자 이날 오전 뒤늦게 "(현재 환율 움직임을) 비정상적으로 본다. 너무 빠른데 이는 시장 원리에 의한 것이 아니다"라며 개입에 나섰지만 불안한 금융시장을 달래기엔 역부족이었다. 금융 당국 고위 관계자는 "증시는 중국 위안화 요인이 많이 작용했다"며 "불안 요인이 단기에 사라지기 어려운 상황인 만큼 추가적인 (시장 안정) 대책도 검토하고 있다"고 했다.

금융 불안이 심상치 않게 전개되면서 정부 내부에서조차 일본의 경제 보복 영향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익명을 요구한 외환 당국 관계자는 "솔직히 말해 (경제 보복에 따른) 환율 영향이 없다고 하기 어렵다"며 "시장의 우려를 잠재울 실효성 있는 대책이 시급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