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청와대 청원게시판에는 '전국 전세 세입자 사망선고의 날'이란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자신을 '갭투기로 인한 전세 사기 피해자'라고 소개한 청원인은 최근 불거진 수백 채 규모의 전세금 미반환 사고를 열거하면서 "내일 신문엔 또 어디서 전세금 피해가 보도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피해자들을 위한 안전망 마련이 필요하다"고 요구했다.

24일 서울 송파구 한 공인중개사무소에 전·월세 안내문이 줄지어 붙어 있다. 주택도시보증공사에 따르면 집주인이 제때 전세금을 돌려주지 않아, 공사가 대신 세입자에게 지급해준 보증금이 올해 상반기 1000억원을 돌파했다. 2017년 한 해 동안 대신 지급해 준 보증금의 30배가 넘는다.

실제로 서울 강서·양천·구로구 일대 집 600채를 소유한 이모씨는 올해 1월부터 연락이 끊긴 채 전세금을 돌려주지 않고 있다. 서울 강서, 양천 일대에 280여 채를 보유한 강모씨도 작년 12월부터 연락이 끊겼다. 모두 갭투자를 통해 수백 채의 빌라·다가구주택 등을 소유한 이들이다. 갭투자는 세입자의 보증금에다가 매매가의 20% 내외 자기 돈을 더해 집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집주인이 제때 전세금을 돌려주지 않는 사고가 벌어졌을 때, 보증기관이 세입자에게 대신 지급해준 보증금이 올해 상반기 1000억원을 넘어섰다. 2017년 한 해 동안 불과 34억원이었던 금액이 1년 반 만에 30배 가까이 늘었다. 작년 한 해(583억원)와 비교해도 이미 2배가 넘는다. 그만큼 세입자에게 전세금을 돌려주지 못하는 집주인, 전세금을 제때 돌려받지 못하는 세입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의미다.

◇전세금 미반환 사고 건수도 18배 늘어…갭투자에 역전세난 겹친 탓

24일, 전세금반환보증보험을 운용하는 주택도시보증공사(HUG)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전세금반환보증보험 대위변제금액은 1084억원에 달했다. 전세금반환보증보험은 집주인이 계약기간 만료 후에도 전세금을 돌려주지 못하면 HUG가 가입자(세입자)에게 대신 보증금을 지급(대위변제)해주고 나중에 집주인에게 청구하는 제도다. 집주인이 보험 가입자에게 전세금을 돌려주지 못해 접수된 사고 건수도 올해 상반기 617건으로, 2017년 한 해 33건의 18배에 달했다.

무리한 갭투자로 곪아가고 있던 문제가 주택시장 침체, 대출 규제가 겹치면서 폭발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갭투자는 적은 돈으로 여러 채 집을 살 수 있어 3~4년 전 유행처럼 번졌다. 집값과 전세금이 오르는 시장 호황일 때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시장이 침체되면 집주인은 전세금을 돌려주지 못하고 세입자는 발을 동동 구르는 상황이 벌어진다.

예컨대 2년 전 현재 세입자와 전세금 3억원에 맺었던 계약이 만료됐는데, 전세금이 현재 2억5000만원으로 떨어졌다면 집주인은 다음 세입자를 구하더라도 차액 5000만원을 마련해야 현재 세입자에게 전세금을 돌려줄 수 있다. 다음 세입자를 못 구하는 경우엔 더 큰 문제다. 이를 역(逆)전세난이라 부른다. 박원갑 KB국민은행 부동산수석전문위원은 "최근 2년 사이 대출 규제가 강화된 데다, 매매가도 하락해 갭투자자는 전세금 반환을 위한 현금 마련이 쉽지 않다"고 말했다.

◇"전세금 미반환 대란 계속될 것"…보증 가입해 피해 최소화해야

전문가들은 갭투자발(發) 전세금 미반환 대란이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심교언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전세금은 최근 보합세를 유지하고 있지만, 주택 공급량이 많은 특정 지역에서 전세금 하락으로 전세금을 돌려주지 못하는 현상이 발생할 것"이라며 "세입자는 보증보험을 들어서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 최선책"이라고 말했다. 작년 말 송파구 헬리오시티 9500여 가구가 입주하면서 인근 전세 시세가 2억~3억원가량 일시적으로 떨어진 것과 비슷한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HUG는 전세금 미반환 대란을 막기 위해 전세금반환보증보험 가입 대상자를 확대하고, 가입 절차를 간소화하고 있다. HUG는 오는 29일부터 전세 기한 만료 6개월 전에도 보증보험에 가입할 수 있는 특례보증을 전국으로 확대한다. 그동안엔 미분양관리지역에서만 가입이 가능했다. 또, 오는 9월부터는 카카오톡의 간편결제서비스 카카오페이를 통해 스마트폰으로도 보증보험 가입이 가능하다. 보증보험 가입은 소득·지역·전세금에 따라 조건이 다르므로 홈페이지(www.khug.or.kr)에서 확인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