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가 협력사에 ‘일본산 소재 전 품목 90일치 이상 재고 비축’을 요청했다. 재고 확보에 필요한 비용과 재고는 삼성전자가 맡겠다는 조건도 붙였다. 일본의 수출 규제가 장기화할 것으로 예상됨에 따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일본 출장 후 주문한 ‘컨틴전시플랜(비상계획)’이 실체를 드러내는 모습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12일 일본 출장을 마친 후 김포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하고 있다.

18일 전자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최근 주요 협력사에 구매팀장 명의로 공문을 보내 일본에서 수입해 삼성전자에 공급하는 모든 자재를 90일치 이상 확보해달라고 요청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최근 구매측에서 재고 확보를 위해 협력사에 공문을 발송한 것으로 안다"고 했다.

특히 삼성전자는 공문에서 "추가 비용이 들더라도 재고 확보가 최우선"이라며 "재고 확보에 필요한 추가 비용은 물론, 재고로 남을 경우에도 삼성전자가 모두 비용을 부담하겠다"는 의사를 전했다고 한다. 전자업계 한 관계자는 "‘갑’인 삼성전자가 ‘을’인 협력사에 모든 비용을 부담하겠다고까지 나서 재고 확보를 요청하는 일은 매우 이례적"이라며 "삼성전자가 재고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지만 역부족이라는 방증"이라고 했다.

일본 정부는 지난 4일 반도체·디스플레이 필수 소재인 포토레지스트(감광액·PR), 불화수소(불산·HF), 플루오린 폴리이미드(FPI) 수출 규제에 나섰다. 이어 오는 24일에는 수출무역관리령 시행령을 개정해 한국을 수출 규제 예외 국가인 일명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할 계획이다. 한국이 화이트리스트에 제외되면 총 1112개 품목이 수출 규제 적용을 받게 된다. 이 시행령은 공표 후 21일이 지난 날부터 적용돼, 8월 22일이면 실효성을 갖게 된다.

삼성전자는 공문에서 "늦어도 8월 15일까지 안전 재고를 확보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화이트리스트 제외 영향은 8월 22일부터 시작되지만, 광복절을 기점으로 한일 관계가 더욱 악화돼 추가 규제가 나올 수 있다는 우려를 나타낸 것으로 풀이된다.

앞서 이 부회장은 일본 출장에서 돌아온 직후인 지난 13일 반도체(DS)·디스플레이(VD) 부문 사장단을 긴급 소집해 경영전략회의를 열고 "일본의 수출 규제가 스마트폰·TV 등 전 제품 생산에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에 대해서도 대비해야 한다"며 "상황별 대응책을 마련해달라"고 주문한 바 있다. 이 부회장은 모바일(IM)·가전(CE) 부문 경영진과도 연이어 회의를 열고 비상경영 계획을 청취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