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0억원→3000억원→7600억원→?’

여야가 국회에 70일 넘게 계류 중인 6조7000억원 규모 추가경정예산안을 오는 19일까지 처리하기로 합의한 가운데, 추경 예산 심사가 주먹구구식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추경 예산 심사 직전에 일어난 일본 정부의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에 대응하기 위한 예산을 반영하는 작업이 밀실에서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각 부처가 추진하는 사업을 정부 예산안에 반영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상임위원회 의결 등이 생략되고, 예결위 소위에 소속된 소수 의원과 정부 관계자들 간 논의로 대응 예산 규모가 결정될 가능성이 커졌다. 국회 계류 80여일만에 본회의 처리를 앞두고 있어 늑장 처리 오명을 쓴 추경안이 절차적 정당성을 상실한 채 졸속 심사로 얼룩지고 있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2019년 7월 15일 오전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국회 예결위 2차 전체회의에 참석하며 김재원 예결위원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17일 국회에 따르면 더불어민주당, 자유한국당, 바른미래당 등 국회 교섭단체 3당 소속 의원 7명으로 구성된 예결위 소위원회는 정부가 제출한 6조7000억원 규모 추경 예산안을 18일까지 심사할 계획이다. 19일 국회 본회의에서 의결할 최종적인 추경 예산안을 심의·확정하는 과정이다. 이 소위에서 추경 예산 사업과 규모 등이 결정된다.

날림·졸속 심사 논란은 일본 수출 규제 대응 예산을 추경안에 추가시키는 과정에서 불거졌다. 일본 정부의 대(對) 한국 수출 규제가 본격화되면서 해당 소재 국산화를 지원하는 예산을 추경안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정부 안팎에서 커졌다. 소재 개발 지원 등 일본 수출 규제 대응 예산이 포함되면 추경 예산 규모가 정부가 제출한 6조7000억원에 비해 커지게 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추경 예산안이 기준 없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12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서 "당장 하반기라도 착수할 필요가 있는 사안에 대해 1차적으로 검토한 것이 1200억원"이라고 밝힌 이후, 일본 대응 예산은 국회 논의 과정에서 3000억원(조정식 더불어민주당 정책위 의장 국회 발언)으로 늘어났다.

지난 15~16일 진행된 예결위 종합정책질의에서는 관련 예산이 약 7600억원까지 늘어날 수 있다는 발언이 나왔다. 지상욱 바른미래당 의원은 "산자위(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예결소위에 올라온 안을 보면 5031억원이 있고, 중기부(중소벤처기업부)에서 올린 안은 2647억원으로 돼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일본 수출 규제 대응 예산이 원칙과 절차없이 책정되고 있다는 점이다. 각 부처에서 소요를 제기한 예산은 소관 국회 상임위원회 의결을 거쳐 예결위에 상정되는 게 원칙이다. 그러나 수출 규제 대응 예산은 이런 과정을 생략하고 있다. 소관 상임위인 산자위 전체회의가 지난 16일 열렸지만, 중기부 업무보고만 이뤄졌고 추경 예산안 의결은 안건으로 올라오지 않았다.

한 야당 소속 산자위 관계자는 "산업부와 중기부가 예결소위를 통해 소요제기를 했다는 이야기는 들은적이 있지만, 정부측이 논의하자고 적극적으로 나서는 분위기는 아니다"고 했다. 다른 산자위 관계자는 "정부측이 소요제기된 예산안을 산자위 의결을 거치지 않고 여당 의원들의 수정안 발의를 통해 예결소위 안건으로 회부하는 우회로를 찾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고 말했다.

이에 김재원 예산결산특별위원장(자유한국당)이 정부 측에 "추경 수정안을 제출하는 것이 낫지 않느냐"고 제안했지만, 홍남기 부총리는 "추경안을 수정안으로 제출한 사례가 없다. 여야 의원이 충분히 검토해 심의해주면 좋겠다"면서 거부했다. 추경 수정안을 제출하면 19일 국회 본회의 통과가 어려워 질 수 있다는 게 정부측이 난색을 보이는 이유다.

그렇지만 지금 방식으로는 수출 규제 대응 예산이 주먹구구식으로 편성될 가능성이 높다. 국회 안팎에서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도 일본 대응 예산 소요제기를 했는데, 규모가 파악이 안된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오는 상황이다. 기재위와 예결위 등 예산 관련 상임위 의원실은 정부측에 일본 수출규제 대응 예산 추경 반영 내역을 보고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감감 무소식이라고 한다. 최소 수천억원에서 최대 1조원에 이를 수 있는 정부 예산이 예결 소위에 참여하는 몇몇 의원과 예산 편성 실무를 맡는 기획재정부 예산실 사이의 합의만으로 급조될 수 있는 구조다.

이번 추경은 3조6000억원 국채 발행을 전제로 편성되고 있어 추경 예산안이 정부 목표대로 ‘6조7000억원 플러스 알파(+α)’로 편성될 경우 국가채무로 인한 부담이 더 커질 수도 있다. 한 기획재정위 소속 야당 의원은 "국민 부담을 늘리는 추경안이 밀실에서 소수 논의만으로 얼렁뚱땅 급조되고 있는 상황"이라며 "일본 수출 대응 등이 시급한 상황이지만, 원칙과 정당한 심의 절차 없이 국민들의 채무 부담이 늘어나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