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경제 보복이 우리나라가 1위인 반도체·디스플레이에 타격을 주는 것뿐 아니라 수소차·배터리·로봇과 같은 미래 테크 산업의 발목도 잡을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기술 개발과 선점 경쟁이 치열한 신산업 분야에서 연구개발(R&D)의 필수 소재·부품 상당수가 일본산(産)이기 때문이다. 일본이 다음 달 한국을 '화이트국가' 명단에서 제외해 전략 물자의 수출 규제를 강화하면 첨단 소재·부품은 거의 빠짐없이 규제 대상이 될 가능성이 크다.

우리나라 정부가 올 초 내놓은 미래 핵심 전략인 '수소경제'는 일본산 탄소섬유가 없으면 실현 불가능하다. 수소차는 폭발 위험이 큰 수소 기체를 가두는 '수소탱크'가 핵심인데 여기에 쓰이는 소재가 탄소섬유다. 일본 도레이와 미쓰비시레이온이 세계 1·2위다. 국내 중견기업 일진복합소재가 수소탱크를 만들지만 탄소섬유는 전량 일본에서 수입한다. 일본이 탄소섬유 수출을 막으면 현대차는 수소차를 한 대도 생산하지 못하는 것이다.

미래 산업인 로봇도 마찬가지다. 로봇의 팔다리에 관절 역할을 하는 핵심 부품인 감속기는 하모닉드라이브라는 일본 기업이 사실상 독점하고 있다. 로봇 분야에 수천억원을 투자하는 우리나라 네이버는 물론이고 미국·독일·이스라엘의 주요 로봇 회사들도 이 회사와 협업한다.

일본이 수출 규제를 확대하면 이런 최고 완성품을 만드는 한·일 간 제조업 분업이 깨질 가능성이 크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작년 한국이 수입한 품목 중 일본 의존도가 50%가 넘는 것은 총 24개에 달했다. 일본이 '우방'에 수출 허가 면제 특혜를 주는 화이트국가에서 한국을 제외하면, 이 품목 대부분이 군사용으로 사용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수출 규제를 받을 수 있다.

일본의 수출 허가 물품은 범위가 광범위해 일본 정부의 해석에 따라 수출 규제 대상이 결정된다. 예컨대 일본 의존도가 91%(전체 수입액 중 일본 비중)인 수치제어반은 일본 수출 허가 리스트의 '수치 제어를 할 수 있는 공작기계'나 '컴퓨터나 수치 제어장치에서 제어되는 측정장치' 항목에 걸릴 것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정옥현 서강대 교수(전자공학과)는 "글로벌 공급 체인은 각국의 분업 체계를 바탕으로 이뤄져 있다"며 "문제 해결을 위한 국가 간의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일본의 소재·부품 수출 규제 강화는 전기차·로봇과 같은 미래 기술 개발은 물론이고, 반도체와 디스플레이의 차세대 연구·개발(R&D) 프로젝트를 막을 수 있는 위험 요소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는 차세대 D램 메모리 개발 프로젝트로 '극자외선 기술'을 추진하고 있다. 두 회사는 이 기술로 세계 최초의 10나노대 D램 개발에서 가장 앞선 상황이다. 이 신기술에 필수적인 소재가 일본이 수출 규제한 극자외선(EUV)용 포토 레지스트(반도체 원판 위에 회로를 인쇄할 때 쓰이는 감광재)다. 일본의 수출 규제가 길어질수록 우리나라와 미국·중국 경쟁사 간 기술 격차가 좁혀지는 상황이다.

차세대 디스플레이인 OLED(유기발광다이오드)는 기존 LCD(액정표시장치)와 달리, 종잇장처럼 얇고 자유자재로 접을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기술력 역시 삼성디스플레이와 LG디스플레이가 보유하고 있지만, OLED의 핵심 소재인 플루오린 폴리이미드는 90% 이상 일본에 의존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폴더블(접히는)폰 '갤럭시폴드'에 들어가는 폴리이미드 역시 일본 스미토모사(社)에서 전량 수입하고 있다. 중국 화웨이를 제치고 폴더블폰의 강자가 되려는 삼성의 스마트폰 사업은 물론 차세대 먹거리인 폴더블·롤러블(돌돌 말리는) 디스플레이 산업까지 일본이 마음만 먹으면 제동을 걸 수 있는 셈이다.

세계 배터리 시장에선 삼성SDI·LG화학이 선두권이지만, 핵심 소재인 '배터리 분리막'은 일본 아사히가세이와 도레이에서 들여온다. 전기차 분리막은 배터리에서 전기를 만드는 양극재와 음극재를 분리해 이온만 통과시키는 소재다. 여기서 문제가 생기면 폭발이나 화재로 이어진다. 분리막 기술이 전기차 배터리의 핵심 경쟁력인 셈이다. 바이오 산업에서도 항체·백신 원료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바이러스를 걸러주는 '바이러스 필터'는 일본이 세계 1위다. 수출이 중단될 경우 의약품 생산에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

다음 달 일본이 한국을 '화이트국가'에서 배제하면 이런 우려가 현실로 성큼 다가온다. 일본의 '수출 허가 물품(전략물자)' 리스트는 포괄적이어서 일본 정부의 입맛에 따라 세부 수출 허가 물품을 설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수출 허가 물품엔 '군용 차량 또는 그 부속품' '군용의 화학제제의 원료가 되는 물질' '전자식의 카메라' 등 포괄적인 품목명이 적혀 있다. 일본은 자세한 사항은 경제산업성령(令)에서 규정한다. 작년 한국이 수입한 품목 중 일본 의존도가 50%가 넘는 총 24개 물품도 일본의 자의적 해석에 따라 규제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작년 일본산 수입 비중이 54%인 '기타 광학기기 부품'도 일본의 수출 허가 물품에 '광학기계 또는 광학 부품의 제어장치'라는 이름으로 올라와 있다. 제현정 한국무역협회 통상지원단장은 "우리 정부는 국산화로 대처한다는데 산업 분야마다 수백 개씩 달하는 필수 소재·부품을 100% 국산화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며 "산업부가 R&D 과제 주고 예산 쓴다고 될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