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장관으로 했던 일과 벤처 투자자로서 하는 일은 본질(本質)이 같습니다. 유럽과 아시아의 창업 생태계를 구축하고, 이들이 기술 패권을 쥐고 있는 미·중 거대 기업에 대항할 수 있도록 돕는 일입니다."

지난 3일 서울 용산의 한 호텔에서 만난 플뢰르 펠르랭(46·Fleur Pellerin) 코렐리아 캐피털 대표는 "IT(정보기술)가 세상의 모든 것을 혁신하고 있지만, 그 성과는 미·중 기업들이 독식하고 있다"면서 "이들의 기술 패권에 맞서 세계 각국의 (기술·문화적) 다양성을 지켜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3일 서울 용산의 한 호텔에서 만난 플뢰르 펠르랭 코렐리아 캐피털 대표는 "유럽과 아시아의 스타트업들이 서로 진출할 수 있는 가교 역할을 하는 것이 내 사명"이라고 했다. 펠르랭 대표는 프랑스 정부에서 중소기업디지털경제·통상·문화부 장관을 역임하고 2016년부터 벤처투자가로 변신, 네이버 이해진 창업자와 함께 스타트업을 육성하고 있다.

펠르랭 대표는 1973년 한국 서울에서 태어나 생후 6개월에 프랑스로 입양돼 파리 인근 베르사유에서 자랐다. 이후 프랑스 에섹(ESSEC)경영대학, 시앙스포(파리정치대학), ENA(국립행정학교)를 졸업했다. 2012년 프랑수아 올랑드 전 대통령에게 발탁돼 중소기업디지털경제부·통상관광부·문화부 장관을 역임했고, 2016년 퇴임해 벤처 투자자로 변신했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지한(知韓)파로 꼽히지만, 스스로는 "한국인이 아니라 100% 프랑스인"이라고 말한다.

"미·중 테크 패권에 저항할 연합군"

펠르랭 대표는 인터뷰 내내 구글·페이스북·아마존·알리바바·텐센트 같은 미·중 기업의 IT 독점을 강하게 비판했다. 펠르랭 대표는 "20세기의 독점(monopoly) 기업은 특정 국가 내 특정 산업에만 존재했지만, 오늘날 IT 독점 기업은 전 산업, 전 세계에 걸쳐 독점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면서 "심지어 국내법의 규제조차 제대로 받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구글을 예로 들며 "검색·쇼핑·이메일 같은 서비스부터 자율주행차 같은 미래 기술까지 장악하고 있지만, 어떤 국가도 구글을 제대로 규제하지 못한다"며 "심지어 페이스북은 자체 통화(currency)까지 만들겠다고 나서는데, 이는 체제를 무너뜨리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상황을 타개할 유일한 해법으로 유럽·아시아의 스타트업 연합군(軍) 육성을 꼽았다. 펠르랭 대표는 "처음 디지털 경제 담당 장관이 됐을 때만 하더라도 유럽인들은 구글과 페이스북, 아마존의 서비스만 써야 했다"면서 "프랑스는 물론이고 유럽 전역에 (이런 상황을 바꿀) 제대로 된 기술 스타트업이 없었다"고 말했다.

프랑스 파리에서 지난해 10월 열린 '한·불 우정의 콘서트'에서 한국 아이돌 그룹 방탄소년단과 만난 플뢰르 펠르랭.

이후 상황은 빠르게 바뀌었다. 유럽에서도 스포티파이·스카이프 같은 글로벌 IT 기업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유니콘(기업 가치 10억 달러 이상의 비상장 스타트업) 기업 수도 지난 한 해에만 14개 늘어났다. 펠르랭 대표는 "특히 런던의 핀테크(금융과 기술의 합성어), 에스토니아의 블록체인(분산 저장 기술) 등은 미국과 중국을 앞선다"며 "이런 스타트업들을 발굴, 투자해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미·중 테크 패권에 대항하는 수단"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해진 네이버 창업자와 손잡은 것도 이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창업자는 지난달 18일 서울의 한 심포지엄에서 "구글 같은 미·중 제국주의 테크 기업들에 끝까지 저항하겠다"며 펠르랭 대표와 같은 문제의식을 드러낸 바 있다.

이 창업자가 세운 네이버와 라인은 2016년 펠르랭 대표가 창업한 코렐리아 캐피털에 지금까지 총 2억유로(약 2650억원)를 출자했다.

그는 정부 규제에 대해서는 부정적 입장을 보였다. 펠르랭 대표는 "각국 정부가 만드는 규제는 결국 현지 기업들을 옭아맬 뿐, 글로벌 거대 기업들을 규제하기 어렵다"며 "전 세계가 디지털 주권(主權), 데이터에 대한 가치 개념을 함께 제정하고 각 기업에 과세, 규제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지만 이는 당장 쉽지 않다"고 말했다.

아시아·유럽의 스타트업 가교 역할

평생 공직에 몸담았던 펠르랭 대표가 벤처 투자자로서 갖고 있는 강점은 뭘까. 그는 "유럽과 아시아에 쌓아놓은 방대한 네트워크(인맥)가 최대 경쟁력"이라며 "IT, 유통, 패션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네트워크를 스타트업들에게 연결해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프랑스와 유럽에서 손꼽히는 유명인이다. 펠르랭 대표는 매년 칸 영화제에 초청받고, 유명 디자이너의 컬렉션 발표회 자리에서 자주 모습을 드러낸다. 그의 인스타그램 계정에는 유명 래퍼이자 디자이너인 퍼렐 윌리엄스, 한국 유명 아이돌인 방탄소년단 등과 함께 찍은 사진도 있다. 여기에다 한국·일본·동남아 IT 산업을 아우르는 이해진 창업자와도 손잡았다. 유럽에 진출하는 한국·일본·동남아 스타트업은 펠르랭 대표의 도움을 받고, 반대로 유럽에서 아시아로 진출하는 기업들은 이해진 창업자를 필두로 한 네이버·라인의 지원을 받는 구조다.

코렐리아 캐피털은 3년간 15곳의 스타트업에 투자했다. 모두 프랑스·영국·에스토니아 등 유럽 기업이다. 하지만 앞으로 아시아로도 투자 범위를 넓힐 계획이다. 펠르랭 대표는 "내년에 결성할 2호 펀드는 한국에 거점을 두고 한국, 일본, 동남아 스타트업 발굴에 더욱 집중할 것"이라며 "이를 통해 진정한 목표였던 유럽과 아시아 스타트업 간의 가교 역할에 더욱 충실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단일 기업, 국가는 미·중을 앞설 수 없겠지만, 유럽·아시아 연합은 이들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이를 통해 더 많은 혁신을 만들고, 사람들에게는 더 많은 선택지를 줄 수 있도록 하는 데 기여하겠다"고 말했다.

[파리는 지금 스타트업 천국]

프랑스는 최근 유럽의 창업 허브로 급부상하고 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프랑스 파리에 있는 스타트업 지원 센터 '스타시옹 F(Station F)'다. 축구장 5개 크기인 연면적 3만4000㎡의 사무 공간에 세계 80여국에서 온 스타트업 1000여곳과 직원 3600여명이 상주하고 있다. 미국 페이스북, 마이크로소프트(MS)와 프랑스의 로레알, BNP파리바, 한국의 네이버 등도 이곳에 입주해 스타트업들을 지원하고, 미래 먹거리를 발굴한다.

창업에 뛰어드는 인재도 늘고 있다. 프랑스 정부의 최근 조사에서 18∼35세 젊은이 중 54%가 "창업에 뛰어들 것"이라고 답했다. 플뢰르 펠르랭 코렐리아 캐피털 대표는 "내가 대학을 다닐 때만 하더라도 모든 학생의 장래 희망이 대기업이나 컨설팅 회사 입사였지만, 지금은 창업"이라고 말했다.

인재의 질(質)도 뛰어나다. 프랑스에만 100만명의 공학 전공자가 있고, 소프트웨어 개발자도 50만명에 달한다. 이렇다 보니 구글·페이스북·삼성전자 등 글로벌 대기업들은 프랑스에 인공지능(AI) 센터를 짓고, 기술·인재 육성에 나섰다. 10억달러(약 1조1800억원) 이상의 기업 가치를 지닌 유니콘 스타트업 수도 지난해 3개에서 올해 5개로 늘었다.


☞플뢰르 펠르랭(Fleur Pellerin)은

ㅡ1973년 서울生
ㅡ생후 6개월 때 프랑스로 입양
ㅡ에섹(ESSEC)경영대, 파리정치대학(시앙스포), 국립행정학교 졸업
ㅡ2012년 프랑스 중소기업디지털경제부 장관
ㅡ2014년 프랑스 통상관광부 장관, 문화부 장관
ㅡ2016년 벤처캐피털 코렐리아캐피털 창업

☞코렐리아(Korelya) 캐피털은

ㅡ2016년 9월 프랑스 파리에서 창업
ㅡ네이버와 라인이 1억 유로씩 총 2억 유로(2650억원) 출자
ㅡ블록체인·차량공유 등 유럽 스타트업 15곳 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