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한 승자는 중국이 될 것이다."

지난 2일(현지 시각) 미국 경제지 월스트리트저널은 오사나이 아쓰이 와세다대 교수의 말을 빌려 이번 한·일 갈등의 수혜자가 중국이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메모리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분야에서 세계 최고 기술력을 보유한 한국이 일본의 필수 소재 확보에 어려움을 겪는 사이, 중국이 기술력 격차를 빠르게 극복하며 추격해 올 것이라는 이야기다. 중국은 이미 4년 전 반도체·로봇·전기차 등 10개 하이테크 제조업 분야를 2025년까지 세계 최강으로 키우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그동안 미국의 견제로 그 계획 달성이 쉽지 않아 보였지만, 이번 한·일 갈등 속에 그 성장 전략이 탄력을 받으리란 분석이 나온다.

◇한국의 'D램 아성' 넘보는 중국

지난달 30일 중국 국영 반도체 기업인 칭화유니그룹은 자체 D램 사업군 회장에 댜오스징 전 중국 공업정보화부 정보처장을 임명하며 D램 사업 진출을 공식 선언했다. D램은 전원이 켜져 있는 동안만 작동하는 메모리 반도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전 세계 시장의 70%(올 1분기 기준)를 차지한다.

그동안 칭화유니는 미국의 반도체 업체를 인수해 몸집을 키우려고 꾸준히 시도해왔다. 2015년엔 세계 3위 D램 업체인 미국 마이크론을, 2016년엔 낸드플래시 메모리 제조업체인 샌디스크를 인수하려고 했지만, 미국의 반대로 무산됐다. 이후 칭화유니는 자회사인 양쯔메모리(YMTC)를 통해 낸드플래시만 생산하다가 이번에 다시 D램 분야에 뛰어드는 것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중국 정부가 이미 저가형 D램을 생산해 온 중국 업체 이노트론푸젠진화 대신 기술력이 한 수 위인 칭화유니를 '선택과 집중'의 대상으로 택한 것 같다"고 말했다.

칭화유니의 D램 사업 진출은 당장 한국 반도체 업체에 큰 타격을 입히지는 않을 전망이다. 중국과 한국의 메모리 기술 격차는 3~5년 정도로 큰 편이다. 미국의 견제로 중국의 반도체 굴기 기세도 한풀 꺾였다. 하지만 거대한 내수 시장과 중국 정부의 지원을 등에 업고 칭화유니가 대규모 설비·R&D 투자에 나설 경우 시장 영향력을 빠르게 키울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2018년 기준 중국 반도체 전체 시장 규모는 1550억달러(182조원)로, 현재는 중국 반도체 업체를 통한 제품 자급률이 15.3%에 불과하다. 하지만 중국은 막대한 지원을 통해 2025년엔 반도체 자급률을 70%까지 끌어올릴 계획이다. D램익스체인지는 "특히 중국 지방정부 등의 대규모 재정 지원이 (칭화유니에) 든든한 힘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디스플레이는 이미 턱밑까지

디스플레이 산업도 마찬가지다. 중국은 지난 몇 년간 LCD 시장에 적극적인 투자를 해 한국 기업의 디스플레이 시장 점유율을 뺏어오고 있다. 작년엔 중국의 BOELG디스플레이삼성디스플레이를 제치고 전 세계 대형 TFT-LCD 패널 시장점유율 1위(23%)를 차지했다.

중국은 차세대 디스플레이인 OLED (유기발광다이오드) 분야에도 투자를 집중하며 한국 업체를 바짝 추격 중이다. BOE가 중국 충칭과 푸저우에 지을 계획인 OLED 생산 공장은 중국 정부가 건설비의 절반가량을 지원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업체들은 이러한 지원을 바탕으로 우선 중소형 OLED 시장을 빠르게 점령해가고 있다. IHS에 따르면 중국 디스플레이 업체들은 2020년 전 세계 중소형 OLED 생산 가능량의 절반 이상(53%)을 차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 업체들은 한국과의 기술 격차를 뒤집기 위해 '잉크젯 OLED' 기법을 도입했다. 잉크젯 프린터가 잉크를 뿌려 인쇄하듯 OLED 용액을 분사해 화면을 만드는 방식이다. 이 기술은 기존 OLED 기술 대비 생산비를 15~25%가량 줄일 수 있다. BOE는 작년 말 잉크젯프린팅 기반의 55인치 OLED 개발에 성공했고, 중국 2위 디스플레이 업체인 CSOT는 2021년부터 잉크젯프린팅 공정 기반의 생산 공장을 가동하겠다고 밝힌 상태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상무는 "한국은 제조, 일본은 소재 기술 등을 발전시키며 한·일은 동반자적 관계를 맺어왔다"며 "이 관계가 장기간 끊어지면 한·일 양국의 제조 기술은 발전하지 않을 것이고, 결국 빠른 속도로 추격하는 중국에 따라잡혀 공멸할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