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아이비리그 명문 브라운대학교, 유럽 최대 이동통신사 보다폰, 중국 최대 인터넷 검색포털 바이두…. 이들의 공통점은 최근 2년 새 현대차그룹의 투자를 받았거나, 제휴를 맺고 있는 기업·기관이라는 점이다. 현대차가 2017년 10월부터 이달까지 1년 10개월 동안 투자·제휴를 맺은 기업·기관의 수는 31곳에 달한다. 업종도 천차만별이다. 전기차·수소차·배터리 등 미래 자동차 플랫폼은 물론, 자율주행과 차량 공유, 물류 등 모빌리티 기술에 이어 인공지능·음성인식·뇌공학 등 IT 업계 영역까지 넘나들고 있다.

지난 4월 정의선(오른쪽) 현대차 수석부회장은 송창현 전 네이버 CTO(최고기술책임자)가 설립한 모빌리티 플랫폼 개발업체 코드42와 투자협약을 맺었다.

미래 자동차 기업은 공장에서 차를 만드는 전통 제조업의 영역을 넘어, 모빌리티 종합 서비스를 제공하는 4차 산업의 영역으로 진입할 예정이다. 경쟁의 장이 기존 자동차 업계에서, 산업 전방위로 확장되는 셈이다. 이항구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자동차 업계는 업(業)과 장(場)이 모두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10년 뒤 자동차 업계, 아무도 모른다"

정의선 현대차 수석부회장은 지난해 현대차그룹의 미래가 어떤 모습일지 예측해달라는 질문에 "어디로 갈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전부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현대차 관계자는 "현재 투자·제휴를 맺고 있는 31개 기업·기관 모두가 미래 현대차의 모습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미국 자율주행업체 오로라는 자율주행 분야에서 소프트웨어·센서·제어 기술 등 통합 설루션을 개발하는 IT 기업이다. 오로라 설립자인 크리스 엄슨은 구글에서 자율주행 기술을 개발한 총책임자였고, 테슬라와 우버에서도 자율주행 기술 엔지니어를 영입했다. 완전 자율주행 기술에 가장 근접한 기업 중 한 곳으로 평가받는다. 바이두는 중국 내 가장 방대한 지도 정보를 갖고 있다. 중국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자율주행 분야에서 현대차와 협력하고 있다.

현대차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현대차가 미래차 시대를 준비하느라 지난 1년 10개월간 합종연횡을 이룬 기업 31곳에 힌트가 있다. 이 회사들은 전기차·수소차·자율주행·인공지능·모빌리티 등을 망라한다. 지난 4월 뉴욕 오토쇼에서 공개한 제네시스 민트 콘셉트카<사진>에는 현대차가 지향하는 미래형 전기차 모습이 담겨 있다.

자율주행차의 '눈'을 강화하기 위해 라이다(레이저로 거리를 측정하는 센서)를 개발하는 옵시스, 열화상 센서(물체 파악)를 만드는 미국 옵시디언, 레이더(악천후 상황에서 물체 파악) 업체인 미국 메타웨이브에 각각 투자했다. 미국 인공지능 스타트업인 퍼셉티브오토마타는 인간의 행동을 예측하는 연구를 진행 중이다. 자율주행차 주변의 보행자가 어디로 움직일지 예측할 수 있게 된다.

현대차는 동남아 최대 차량 공유 기업인 그랩에 3120억원을, 비슷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인도 올라에는 3384억원을 쏟아부었다. 급속도로 성장 중인 모빌리티 서비스 시장에서 점유율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현대차그룹은 2023년까지 모빌리티·자율주행 부문에 총 45조3000억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현대차는 이미 많은 투자가 진행돼 온 수소전기차 부문에도 2030년까지 추가로 8조원을 투자하고, 수소차를 대중화하겠다는 방침이다.

"비용 절감에 생존 달렸다"

당초 현대차는 외부 협업보다는 독자적 연구개발을 지향했다. 분위기가 변한 건 정의선 수석부회장이 본격적으로 그룹 경영에 나선 2017년이었다. 현대차는 그해 2월 전략기술본부를 출범시키고, IT·인공지능·공유경제 등을 바탕으로 제품과 서비스를 개발하는 컨트롤 타워 역할을 맡겼다. 8개월 뒤인 10월 미국 미시간주 자율주행 연구기관인 ACM에 투자하며 외부 확장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자동차 기업인 현대차가 차량 공유, 모빌리티 원천 기술을 가지려면 막대한 초기 개발 비용을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투자 협약을 통해 접근하면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업계 선진 기술을 확보·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김필수 대림대 교수는 "예전엔 자동차 기술을 자동차 회사가 갖고 있었다면, 전기차·자율주행차가 주역이 될 미래엔 IT 기업은 물론, 화학·배터리 기업, 인공지능·빅데이터 기업도 자동차를 개발하고 시장을 지배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IT 스타트업이 아닌 전통 자동차 업체와의 협업도 장려된다. 이를테면 아우디와 진행 중인 수소차 협력은 차량 개발 비용을 아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특허를 공동으로 사용하고, 부품도 공유할 수 있다. 이항구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미래차 개발에는 거액의 자금이 필요한 만큼 아군을 최대한 만들어 경영 자원을 결집하고, 투자 중복을 피하는 것에 기업 생존이 달려 있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