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日, GATT 11조 위반…명분·여론도 우호적"
전문가 "안보때문에 규제한다는 日 주장 깨야 승산"

일본의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 수출통제 강화 조치가 4일 시행됐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이날 "WTO(세계무역기구) 제소를 위한 내부 검토 절차를 진행 중이며 실무 검토가 끝나는 대로 제소 시기를 결정하겠다"며 정부 입장을 밝혔다. 정부는 WTO 제소 시 우리나라가 일본에 승소할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판단하지만, 통상 전문가들은 낙관론으로 접근했다가는 패소할 가능성도 크다고 분석했다.

정부는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가 '수입·수출에서 수량 제한 시 시장의 가격 기능이 정지되고, 관세보다 쉽게 무역 제한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특별한 예외가 아니라면 수량 제한을 금지'하는 관세무역일반협정(GATT·가트) 11조를 위반했다고 보고 있다. 가트 11조에 일본의 수출허가제도를 금지 사례로 명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명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이 4일 일본의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 수출통제 강화 조치에 대응하기 위한 관계기관 회의를 열고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국제 여론이나 명분 역시 우리나라에 우호적이라는 것이 정부의 판단이다. 홍 부총리를 비롯해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유명희 산업부 통상교섭본부장은 "일본의 수출 규제는 '자유롭고 공정하며 비차별적이고 투명하고 예측 가능하며 안정적인 무역과 투자 환경을 구축하고 시장개방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지난 G20 오사카 정상 선언문의 합의정신에 반한다"고 입을 모았다.

정부 관계자는 "WTO 제소는 법적인 정당성 외에도 명분, 여론 등이 중요한데 국제적으로 일본의 수출 규제가 WTO의 기본정신에 위배된다는 암묵적인 컨센서스가 형성돼있다"고 했다.

정부는 일본이 우리나라에 대한 수출 규제를 안보 이슈로 이어갈 것으로 내다보고 대응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일본은 반도체 소재가 반도체 제조에 쓰이고, 이를 통해 만들어진 반도체가 첨단 무기에 사용되기 때문에 안보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논리가 예상된다. 가트 21조에 따르면 안보상 전략 물자로 분류할 경우 수출을 제한할 수 있도록 돼있다.

통상 전문가들은 이번 건은 WTO 제소시 법적으로 치열하게 다툴 문제로, 우리나라의 승소 가능성이 일본에 비해 딱히 높다고 보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기대하는 것처럼 우리나라에 유리한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일본이 승소할 여지도 충분하다는 분석이다.

온기운 숭실대 교수는 "앞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국가 안보를 문제 삼아 철강 수입을 제한한 적이 있다"며 "일본이 해당 품목을 전략 물자로 취급하면 우리나라의 승소 가능성이 희박할 수도 있다"고 했다.

이재형 고려대 교수도 "가트 21조를 보면 국가 안보와 관련해 예외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해당 국가에서 판단하도록 돼있다"며 "일본이 안보에 위협이 되는지 아닌지를 재량 껏 판단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에 비해 과도한 혜택을 받다가 줄어든 것으로도 볼 수 있다고 했다. 이 교수는 "일본은 27개 국가에 대해 수출입을 편하게 할 수 있는 '화이트리스트'를 운영하는데, 화이트리스트에 포함되지 않은 다른 국가들은 그런 대우를 받지 못했음에도 따로 이의제기를 하지 않았다"며 "이런 대우가 WTO에 제소 하더라도 승소하기 쉽지 않겠다는 판단이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우리나라는 화이트리스트에 포함되지 않은 국가들에 비해 우대를 받다가 앞으로 그런 국가들과 같은 상황으로 바뀔 수 있는 문제라 이의 제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우리나라 대법원 판결에 따른 보복 조치임을 증명하기 쉽지 않다는 것도 우리나라의 승소를 쉽게 얘기할 수 없는 이유다. 한 통상 전문가는 "일본 언론 등에서 강제 징용 대법원 판결에 대한 경제 보복이라는 지적이 나오지만, 뚜렷한 증거가 없는 상황"이라며 "필요한 증거는 다 일본에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이를 입증하기는 쉽지 않을 수 있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우리나라가 승소하려면 약한 고리를 강화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천기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박사는 "가트 21조 안보 예외 사항과 관련해 올해 4월에 채택된 패널 보고서를 보면 국가 안보 보호가 필요한지 여부는 해당국가가 정할 수 있지만, 해석을 적용하는 데 있어서 신의성실하게 임했는지는 패널이 판단할 수 있다는 내용이 나온다. 우리나라는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나 스가 요시히데 일본 관방장관은 ‘양국간 신뢰관계가 깨졌다’는 식의 언급을 이어갔는데 이를 강제징용 판정의 후속 조치로 수출 규제가 이뤄졌다는 논리가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이재형 교수는 "사실 처음에 WTO 제소한다고 했을 때는 승소하기가 쉽지 않다고 판단했지만, 아베 총리가 계속 공개적으로 우리나라 대법원 판례 얘기를 하니 전혀 못 이길 것도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다"며 "수출규제가 국가 안보 때문이라는 일본의 주장에 의구심을 남길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천기 박사는 "아베 총리나 스가 관방장관의 인터뷰 내용을 보면, 우리 대법원 강제 징용 판결에 대한 보복조치가 아니라 하면서도 은연 중에 속마음이 튀어나오는 것 같다"며 "우리로서는 이를 바탕으로 최대한 강제징용 판정의 후속 조치로 일본이 수출 규제에 나섰다는 것을 조명해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