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원 정도를 깎아주기 위한 정부의 포퓰리즘 정책에 공기업이 막대한 피해를 입는 것은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다."(정범진 경희대 원자력공학과 교수)

한국전력공사 이사회가 일주일 전 보류했던 ‘전기요금 누진제 개편안’을 통과시켰다. 28일 한전 이사회가 개편안을 수용하면서 1629만가구가 월 평균 1만142원의 전기요금을 할인받게 됐다. 7~8월 여름철 누진제 구간이 확대됐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한전의 손해가 명백한 상황에서 이사회가 정부의 선심성 정책을 거부하지 못한 것을 두고, 배임죄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보고 있다.

지난 21일 서울 서초구 한전아트센터에서 한국전력 이사들이 ‘전기요금 누진제 개편안’을 다루는 이사회를 기다리고 있다.

◇ 정부가 한전 손해 보전 안하면 한전 이사 ‘배임’

한전은 이날 오후 6시 서울 서초구 한전아트센터에서 이사회를 열고 민관 태스크포스(TF)가 제시한 전기요금 개편 최종 권고안을 토대로 심의를 진행한 결과, 안건을 의결했다. 한전은 통과된 안에 대해 정부에 인가 신청을 할 계획이다. 정부는 전기위원회 심의와 인가를 거쳐 다음달부터 새로운 요금제를 적용할 것으로 보인다.

정부의 권고안 대로라면 한전이 연간 부담해야할 추정액은 지난해 기준 2847억원이다. 권고안은 첫번째 요금 할증 구간을 기존 월 사용량 200kWh 이상에서 300kWh 이상으로, 두번째 요금 할증 구간은 400kWh 이상에서 450kWh 이상으로 각각 높이는 것이 핵심이다.

한전은 이날 "이사회에 상정된 주택용 전기요금 체계개편을 위한 기본공급약관 개정안이 원안 가결됐으며, 전반적인 전기요금 체계 개편 안건도 함께 가결됐다"며 "자세한 내용은 다음달 1일 공시로 알리겠다"고 했다.

한전은 누진제 개편안 가결에 따라 부담할 손해를 정부가 보전해주는지, 가결된 전기요금 개편이 ‘필수사용량 보장공제(월 사용량이 200㎾h 이하인 소비자에게 월 4000원 한도로 요금을 깎아주는 제도)’를 폐지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회사에 손해를 입히는 안건을 통과시킨 이사회가 향후 배임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정용훈 카이스트 교수(원자력·양자공학과)는 "정부가 누진제 완화에 따른 한전의 손해를 보전해주지 않고서는 한전 이사들은 배임에 걸릴 것"이라며 "국가가 세금으로 한전의 손해를 보전해준다고 하면 국민이 할인받은 전기료 만큼 세금을 내는 조삼모사 상황"이라고 말했다.

정범진 경희대 교수는 여름철 전기료 할인에 대해 "무리한 포퓰리즘 정책"이라며 "국민들은 내돈 만원을 덜 내기 보다 사회가 건강해지는 것을 더 원할 것"이라고 했다. 주한규 서울대 교수(원자핵공학과)는 "한전의 손해, 적자를 정부에서 보전해준다고 해도 국회의 동의를 얻기는 어려워 보인다"며 "3차 에너지기본계획에서 내놓은 정책은 전력 수요를 감축하겠다는 것인데, 피크 수요를 줄이는 방향이 아닌 누진제 완화는 현 정책과 상충된다"고 말했다.

28일 오후 서울 서초구 한전아트센터 앞에서 한국전력 소액주주들이 한전의 주가 하락과 적자 경영과 관련해 김종갑 한전 사장의 사퇴를 촉구하고 있다.

◇ 소액주주, 경영진 고소 경고…법적분쟁으로 번질듯

한전 이사회는 김종갑 사장 등 사내이사 7명, 김태유 서울대 명예교수 등 사외이사 8명으로 구성됐다. 안건 통과는 과반수의 표를 얻어야 한다. 한전은 지난 21일 이사회를 열어 누진제 개편안을 논의했지만, 의결하지 않고 보류했다. 당시 이사회는 정부가 재정지원안을 내놓아야 한다고 요구했다. 적자에 허덕이는 한전이 3000억원에 달하는 할인액을 부담하는 것을 두고 배임 논란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탈원전으로 적자에 허덕이는 한전의 재정부담은 심화될 모습이다. 한전은 정부의 탈원전 정책 영향으로 지난해 6년 만에 적자를 냈고, 올 1분기에는 6299억원의 영업손실을 냈다. 발전단가가 저렴한 원전 대신 발전단가가 비싼 LNG(액화천연가스)와 신재생을 늘린 것이 원인이다. 누진제 개편안을 가결을 놓고 전문가들은 정부 지분이 51%를 넘는 에너지 공기업인 한전 이사진이 끝내 정부의 압박을 못이겨낸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소액주주들은 개편안이 의결될 경우 경영진을 배임행위로 고소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소액주주들도 이날도 한전을 찾아 정부의 적자 보전 방안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이에 따라 한전과 소액주주의 법적분쟁이 예고되고 있다. 권기보 한전 영업본부장은 "정부가 제시한 전기요금 누진제 개편안 모두 한전에 부담을 주는 안"이라며 "한전이 공기업으로서 사회적 책임뿐 아니라 주주 이익도 대변해야 하는 복잡한 문제가 있다"며 우려한 바 있다.

한편, 한전은 로펌 두 곳에 전기요금 누진제 개편안을 의결할 경우 배임에 해당하는지, 소액 주주들이 이 문제로 소송을 제기해 패소할 경우, 임원 책임 배상 보험으로 처리할 수 있는지 등을 문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