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오전 경북 상주시 모동면에 있는 포도 하우스 A영농조합법인. 농부 김공묵(49)씨가 열매를 감싼 종이를 조심스레 벗기자, 알이 500원짜리 동전만 한 청포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샤인머스캣' 품종 포도다. 김씨는 "올해 1.65ha(약 5000평) 밭에서 매출 4억원이 예상된다"며 "서울 강남 상권에서만 팔리던 비싼 과일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을 줄은 몰랐다"고 했다.

최근 신(新)품종 샤인머스캣 포도가 국내 포도 농업에 활기를 불어넣는 새로운 스타로 떠올랐다. 사양길에 접어든 지 20년 된 포도 농업 분야에서 나 홀로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 포도 재배 면적은 2004년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으로 씨 없는 칠레산(産) 포도가 등장하자 급속도로 줄기 시작해 현재 반 토막이 난 상황이다. 5년 전 시장에 유통되기 시작한 국산 샤인머스캣은 단숨에 전체 포도 면적의 14.2%를 차지하는 품종으로 성장했다.

14일 경북 상주시 모동면의 한 포도 재배 하우스에서 농부 김공묵(오른쪽)씨와 현대백화점 청과 구매담당자 서원씨가 샤인머스캣 포도를 보여주고 있다.

껍질과 씨를 따로 뱉어야 하는 일반 캠밸·거봉·머루(MBA) 포도와 달리 샤인머스캣은 껍질째 씹어 먹는 씨 없는 청포도다. 당도가 일반 캠밸보다 4~5도 높은 18브릭스(brix)에 달하며 가격은 캠밸보다 4배 정도 비싸다. 샤인머스캣은 2년 전부터 '작은 사치(small indulgence)'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 소비 트렌드와 맞물리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소비자들은 샤인머스캣을 '포도계의 샤넬' '포도계의 에르메스'라는 별명을 붙여가며 지갑을 열고 있다.

◇샤인머스캣 열풍… 묘목 품귀 현상까지

이날 찾은 경북 상주시 모동면은 지난해 전국에서 샤인머스캣을 가장 많이 생산한 마을이다. 인구 2600여명의 작은 면(面)이지만, 2년 새 '샤인머스캣 대박'을 맞으면서 전국 포도 농가의 부러움을 샀다. 모동면사무소 관계자는 "지난해 모동면에서 200여개 농가가 샤인머스캣 농사를 지어 178억원의 수익을 거뒀다"고 했다. 지난 17일 서울가락시장의 샤인머스캣 경매 최고가는 ㎏당 4만원으로 캠밸 포도(㎏당 8000원)보다 5배 높았다. 백화점에서 최상품 한 송이는 2만7000원에 판매되고 있다.

인기가 치솟자 최근에는 묘목 품귀 현상까지 벌어졌다. 국내 묘목의 70%가 유통되는 경북 경산의 한 묘목조합 관계자는 "지난해 2000~2500원에 판매했던 샤인머스캣 묘목이 3배 정도 가격이 올랐다"고 전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농업관측본부는 "다른 포도 품종은 재배 면적이 모두 줄었는데, 올 들어 샤인머스캣만 작년보다 96% 늘었다"고 밝혔다. 경북 상주·영천·김천과 충북 영동 지역이 현재 샤인머스캣의 주요 산지로 꼽힌다.

◇현해탄 건너 온 샤인머스캣

샤인머스캣은 1988년 일본에서 개발된 품종이다. 2006년이 돼서야 일본에서 품종 등록이 이뤄졌다. 당시 수출까지 고려하지 않았던 터라 해외에는 따로 품종 출원을 하지 않았다. 국내 4000여개 포도 농가로 구성된 한국포도회가 샤인머스캣을 알게 된 시점도 그 무렵이다. 황의창(62) 한국포도회장은 "칠레에 이어 페루·미국·호주산 포도가 잇따라 국내 시장에 들어오자 캠밸·거봉만으론 이 포도들과 싸울 수 없다는 판단에서 샤인머스캣을 전략 육성했다"고 했다.

한국포도회 농민들은 2007년부터 시험 재배를 통해 국내 환경에 맞는 재배법을 찾아냈다. 본격적인 유통에 나선 것은 2014년이다. 그해 고급 과일의 격전지로 통하는 현대백화점 압구정본점에 샤인머스캣이 등장해 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서원(30) 현대백화점 청과 구매담당자는 "2014년 9.8t 팔렸던 샤인머스캣이 지난해에는 134t이나 거래됐다"며 "지금은 거봉이 '최고급 포도' 자리를 샤인머스캣에 완전히 내준 상황"이라고 했다. 지난해 코스트코도 국산 샤인머스캣 600t을 납품받았다. 중국·러시아·베트남·태국·뉴질랜드 등 11국에도 수출되고 있다. 현재 중국 베이징의 고급 백화점인 SKP백화점에서 한국산 샤인머스캣 포도 최상품 1송이가 11만6000원에 팔리고 있다.

문정훈(46)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교수(푸드비즈니스랩 소장)은 "샤인머스캣은 농업 분야에서 신품종 개발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주는 사례"라며 "다만 아로니아·블루베리처럼 샤인머스캣도 공급량이 갑자기 늘면서 가격 하락 사태로 이어질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